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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부 여행

여주 가볼만한 곳, 명성황후 생가

by 휴식같은 친구 202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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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가볼만한 곳,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우리나라 역사에서 치욕으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인들의 명성황후 시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주는 조선시대 왕후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기도 한데요.

고종의 비, 명성황후 또한 여주지역 출신입니다.

 

여주 가볼만한 곳의 대표적인 여행지, 영녕릉을 관람하고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로 이동했습니다.

 

세종대왕릉의 영릉과 효종대왕릉의 영릉, 여주 영녕릉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는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여덟 살 때까지 살던 집입니다.

명성황후 생가에는 기념관과 생가를 비롯하여 민속마을과 감고당 등이 있어 볼거리가 참 많이 있는 곳입니다.

 

명성황후 생가 관람안내

 

관람시간 11~2월 09:00~17:00, 3~10월 09:00~18:00

(마감 30분 전까지 입장가능)

휴관일(휴무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당일

관람료 무료

주차장 주차요금은 경차 500원, 소형차 1,000원(여주시민은 무료)

 

명성황후 생가 유적지 관람 순서입니다.

 

명성황후 기념관과 명성황후 생가, 민속마을과 감고당 순으로 관람하면 되는데요.

관람 소요시간은 대략 1시간이면 모두 관람할 수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보이는 감고당

감고당은 제일 아래쪽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감고당 옆에는 민속마을이 잇는데 식당과 카페, 기념품 판매장 등이 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오면 하마비를 만납니다.

하마비가 있는 곳을 지나치면 신분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서 지나가라는 의미입니다.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와 궐문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무 푯말을 세워 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인원개하마'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고 합니다.

 

하마비는 보통 왕이나 장군 등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지는데, 근처에 민유중 선생 묘와 명성황후 생가가 있어서 이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하마비가 세워졌습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앞의 예쁜 정원

정자까지 한 폭의 풍경화 같네요.

 

전면에 있는 것이 명성황후 일대기를 배울 수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입니다.

 

기념관 옆에 있는 한옥이 바로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16살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로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가다가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남양주 홍릉에 합장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명성황후는 개화기 개혁을 추구하다가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있는 건청궁 내 옥호루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했습니다.

1981년 건청궁 내 동쪽 구릉지에 건립하였던 이 숭모비는 건청궁의 복원과 개방으로 이전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명성황후 시해 112주기를 맞아 2007년 10월 8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옆에 있는 문예관인데요.

명성황후와 관련된 공연과 행사가 열리는 곳입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친필과 고종황제의 편액 등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입니다.

 

입구에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 대형 초상화

 

명성황후 연표

1851년 9월 25일 명성황후 출생

1859년 아버지 민치록 사망

1863년 조선 26대 고종 즉위, 흥선대원군 집권

1866년 명성황후 간택

1874년 대군 출생(27대 순종)

1887년 명성황후 이화학당 교명 하사

1888년 명성황후 전속의로 미국인 여의사 홀튼 등용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1897년 명성황후 국장거행, 대한제국수립, 황제즉위

(명성왕후에서 명성황후로 개칭)

 

어린 시절의 명성황후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민유중은 숙종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입니다.

민치록은 민유중의 5대손으로 명성황후의 아버지입니다.

 

왕비가 되다

 

 

창덕궁 중희당에서 초간택 심사를 받고 삼간택에서 왕비로 선택되었습니다.

감고당에서 나와 운현궁의 노락당에서 50일 동안의 가례 준비를 하며 궁중법도를 익혔다고 합니다.

 

운현궁,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가에 산책 다녀왔어요

 

운현궁에서의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 모습

 

조선 개화 선봉에 서서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 이름을 하사하고,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며 개화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국장 모습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나와 생가로 이동했습니다.

 

명성황후 생가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 있습니다.

1996년 안채를 수리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지어 원래 모습을 되찾은 상태입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네요.

 

명성황후 생가 입구인 행랑채

 

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데 있는 건물로 집안일을 하던 하인들이 생활하던 공간이었습니다.

혹은 곡식을 저장하던 곳간으로도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채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고, 친지들의 친목 도모 공간, 학문을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하던 공간이었습니다.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모습

1687년에 지어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안채는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불리는 말입니다.

 

명성황후 초상화가 안채에 걸려 있네요.

 

옆으로 나가면 별채(별당)가 있습니다.

별채는 집과 별도로 지은 건물로 사랑채의 연장이거나 미혼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도 사용했던 곳입니다.

 

명성황후는 1851년 음력 9월 25일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별당 앞에 있는 하얀 목련이 만개를 했네요.

 

명성황후 생가 우측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가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고종 41년(1904)에 명성황후의 고향 집에 세운 비입니다.

 

이 비가 있던 자리는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 공부한 별당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형태인데요.

비의 앞면에는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이라는 의미의 '명성황후탄강구리'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1904년 5월 어느 날 두 손을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는 의미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글씨는 명성황후의 아들이자 조선 27대 임금인 순종황제제의 친필이라고 전해집니다.

비각은 1970년에 새로 보수한 것이라고.

 

그리고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 옆에는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면서 명성황후의 6대 조인 민유중의 묘. 신도비가 있습니다.

신도비 뒤쪽에 민유중의 묘가 있습니다.

 

생가에서 나와 좌측으로 이동하면 새로 조성한 민가마을이 나옵니다.

 

산수유도 피기 시작했네요.

 

민가마을엔 식당과 카페, 기념품 판매점들이 있으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항아리 포토존이 예쁘네요.

 

연자방앗간도 있습니다.

 

생가와 민속마을 옆에는 감고이 있습니다.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가 친정을 배려해 서울 안국동에 지은 건물이고, 여흥 민씨 가문의 후손인 명성황후가 여덟 살 때 서울로 올라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기도 합니다.

결국 조선왕조의 두 왕비가 기거했던 건물이네요. 

 

 

숙종의 계비(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1667~1701)가 장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물러났다가 복위 될 때까지의 5년 동안 살았던 곳입니다.

명성홯후(1851~1895)는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 3)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서울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위치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쌍문고 신축 계획에 따라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여주시가 2006년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던 차에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합니다.

한옥 몇 채를 거뜬히 옮겨 놓은 기술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고당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던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란 편액을 하사한 후부터라고 합니다.

 

중문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위치한 중문채는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주했던 곳입니다.

 

사랑채

 

안채

 

감고당 일대 모습

 

감고당 옆에는 소원바위가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어 53세의 나이에 명성황후를 낳았다고 합니다.

 

 

아픈 역사는 아프다고 해서 그냥 묻어둬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필요한 법이지요.

 

여주 가볼만한 곳, 영릉과 함께 명성황후 생가도 함께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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