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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김포 장릉 나들이

by 휴식같은 친구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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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아버지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김포 장릉 나들이

 

 

지난 주말 김포 장릉에 산책하러 다녀왔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숲 속을 걸으며 조선왕릉을 관람하기에 좋은 곳이라 많은 분들이 방문하고 있더군요.

더욱이 코로나 거리두기 4단계라 야외 나들이를 주로 나오는 듯합니다.

 

김포 장릉은 왕위에 오른 왕릉이 아니라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정원군의 묘소가 묘에서 원으로, 원에서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로 승격된 조선왕릉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조선왕릉은 정자각에서 봉분이 대부분 보이지 않는데, 김포 장릉은 묘를 만들어 놓은 곳을 왕릉으로 조성하다 보니 봉분이 모두 보이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조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정원군, 즉 나중에 원종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의 조선왕릉 이야기입니다.

 

김포 장릉 관람안내

 

입장료 성인(25~64세) 1,000원 

관람시간 2~5월/9~10월 06:00~18:00, 6~8월 06:0  18:30, 11~1월 06:3  17:30

(1시간 전 입장마감)

휴무일 매주 월요일

주차장 무료

관람소요시간 40분~1시간

 

 

원종(1580~1619)은 14대 임금인 선조와 인빈 김씨의 세 번째 아들(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로 정원대원군이었고, 그의 첫째 아들인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오르자 사후에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에는 왕(원종)으로까지 추존되었습니다.

 

인헌왕후(1578~1626)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90년(선조 23)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지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연주군부부인, 사후에는 인헌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숲길이라 그늘이 있어서 여름에도 산책하기에 좋은 듯합니다.

다만, 숲이다 보니 모기와 날파리들이 산책하는 동안 얼굴 주위에서 소리치며 따라다니는 고통(?) 정도는 감내해야 합니다. 

 

매표소 안에 장릉 역사문화관이 있는데, 코로나 거리두기 4단계라 입장은 할 수 없더군요.

조선왕릉과 김포 장릉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는데, 대신 2년 전에 방문해서 기록한 글과 사진이 있어 공유합니다.

 

김포 장릉(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참고로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에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입니다.

 

적자가 아니었던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점은 높게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을 죽이고 대비를 유체 하였으며, 오랑캐라고 하던 후금과 명에 균형외교를 유지하는 것은 서인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재위 1623~1649)는 반정공신들의 영향력 때문에 왕권을 강화하지 못했는데요.

이에 명과의 의리를 지키려는 신하들로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항복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임금으로 유명합니다.

 

장릉의 재실

 

장릉은 1626년(인조 4)에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를 안장했고, 육경원이라 불렀습니다.

1627년(인조 5)에 양주에 있던 원조의 홍경원을 현재의 자리에 이장하고, 인헌왕후의 육경원도 같이 옮겨 쌍릉으로 조성했습니다.

1632년(인조 10)에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능제를 왕릉의 형식에 맞게 저시 조성하였습니다.

김포 장릉의 제향일은 매년 10월 5일입니다. 

 

김포 장릉에는 대부분 왕릉에서 사라진 연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연지 앞에는 1849년(철종 즉위년) 장릉령(장릉 관리하는 정 5품)에 임명된 이제상이 1850년에 연지를 수리하고 지은 시가 적혀 있습니다.

 

"능침아래 황폐해진 연못 줄곧 그대로 두었는데

열 장부가 일하여 이십일만에 완성하였네.

나그네가 노니는 즐거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재관이 빠뜨린 것이 많아서라네.

돌길에 끼인 안개는 작은 섬을 두르고

금빛 연못에 밝은 달은 맑은 파도를 비추네.

선왕이 남긴 은택 덕분에 백성이 자식처럼 오니

진실로 종묘와 사직에 복이 아니겠는가"

 

장릉 앞 연지에는 몇 개의 연꽃이 피어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7분 정도 걸어 들어오면 김포 장릉이 보입니다.

 

장릉 입구의 홍살문

그리고 행로와 어로가 조선왕릉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정면은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왕릉을 지키는 사람이 있는 수복방, 왕릉 주인공의 업적을 적은 비각 등이 있습니다.

 

왕릉 정면에 있는 정자각

왕릉 제향을 올리는 장소로 정(丁) 자 모양으로 지은 전각입니다.

 

육경원과 홍경원에 있던 묘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홍경원이라 하였고, 이후 원종으로 추대되면서 장릉이라는 왕릉으로 조성하다 보니 아래쪽에 쌓는 사초지가 낮아 쌍릉이 모두 눈에 들어옵니다.

조선시대 묘에서 원, 원에서 능으로 승격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정자각에서도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 그대로 보입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향로와 어로, 홍살문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지만 늘 왕위를 위협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던 중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을 들었고, 실제 정원군의 셋째 아들인 능창군은 성품이 호탕하고 인물이 훤칠하며 무예까지 뛰어나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회 등이 능창군을 왕위로 추대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에 광해군은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하고 1615년 정원군의 집을 몰수해 자신의 궁궐을 지었습니다.

 

선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정원군은 유배된 아들의 목숨을 잃고 집까지 뺏기며 고생하다가 젊은 나이인 40세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맏아들 능양군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인조입니다.

 

죽은 후 원종이라는 왕의 칭호까지 듣지만, 그의 원한이 풀어졌는지는 모르겠네요.ㅎㅎ

 

원종과 인헌왕후의 업적을 기록한 비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인헌왕후가 사후에 묻혔던 육경원에 있던 비석 받침돌이 있습니다.

 

육경원 받침돌2007년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땅에 묻어 있던 것이 지상에 노출되어 발견된 것입니다.

 

원에서 능으로 바뀌면서 이 비석이 필요 없어지면서 땅 속에 묻었으리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육경원 당시 비석은 근처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비석 받침돌의 화려한 문양들이 돋보입니다.

 

장릉 주위로 숲 속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작은 저수지도 나옵니다.

 

딸아이가 장난치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는 바람에 매표소에서 약을 바르러 바로 나왔네요.

큰 상처는 아니지만 며칠 동안 진물이 나오며 고생 좀 했답니다.

 

 

조선왕릉을 통해서 그 시대의 이야기, 왕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이 아닌 두 번을 방문하니 그 깊이도 깊어지는 것 같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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