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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돌아보다

by 휴식같은 친구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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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돌아보다

 

 

완연한 봄 날씨에 점심식사 후 가가운 곳에 청계천이 있어 오랜만에 청계천을 걸었습니다.

인적도 드물고 화창한 날씨에 청계천을 산책하니 봄이 한창이란 걸 깨우치게 하는 것 같네요.

 

청계천 봄 풍경

 

청계 2가 교차로 쪽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은 한국노동 운동사에서 중요한 기점을 마련한 전태일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건립한 노동 복합시설입니다.

전태일은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사람중심의 세상을 꿈꿔 지금의 대한민국 노동시장을 만든 주역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태일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전태일 열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전태일 기념관의 전시 모습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특별기획전 모습을 담았습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은 청계천 2가 교차로, 수표교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큰 건물이 없고 독특한 외관 때문에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전태일 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11~2월 10:00~17:30, 3~10월 10:00~18:00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 당일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없음

 

전태일기념관 앞에 있는 전태일 열사 조형물

 

건물 정면의 외벽을 자세히 보면 글씨로 적혀 있더군요.

그 글은 전태일 열사가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로 미술가 임옥상이 재해석하여 건축사 윤정원과 하우건축사사무소에서 설계, 시공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 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장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 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메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시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

 

전태일기념관은 총 6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념관으로 사용하는 곳은 3층 이음터와 꿈터입니다.

나머지 공간은 서울노동권익센터, 교육실과 세미나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네요.

 

지금 우리 시대의 전태일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고, 전태일의 쑴을 상상합니다.

노동과 예술의 접경을 걷는 사람들과 새로운 노동예술을 이야기합니다.

 

전태일의 어린시절

 

1948. 8.26 대구시 동산동 출생

1951.3(4세) 부친 사업실패로 부산 이전

1954.8(7세) 서울역 염천교 부근 주택가에서 처마살이

 

1959년(12세) 아버지 사업실패로 돈 버는 일 시작

1960.5(13세) 아버지가 사기당해 이태원 친구집 헛간으로 이사

1961.8(14세) 집을 나와 남대문시장에서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떠돌이 생활

1961.8(14세) 아버지와 전태일을 제외한 가족 대구 귀향

1962.8(15세) 서울 가출생활을 끝내고 대구로 귀향

1954.10(7세) 남대문시장 옆 천막촌 거주

 

 

가난한 집안에서 고된 어린시절을 보낸 전태일.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대구와 부산, 서울을 오가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고, 어린 나이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우산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을 가장 행복한 때로 기억하고 있답니다.

 

1964.2(17세) 설날 아침 어머니 이소선은 서울로 식모살이 떠남

1964.2(17세) 막내 순덕이와 어머니 찾아 상경

1964.4(17세) 동생 태삼 만나 남산 무허가 하숙집 거주

1965.9(18세) 구두닦이, 신문팔이, 빈병줍기, 하드장사, 껌팔이 등으로 생활

 

 열악한 가정환경으로 18세까지 이집저집 떠돌이 생활을 한 전태일 열사의 삶은 당시 시대의 거의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아갔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전태일의 눈

 

1965년 18세의 전태일은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로 첫 삶을 시작합니다.

평생의 첫 직장에 대한 기대감도 잠시 비참하고 끔찍한 노동 현실과 마주하게 되죠.

 

평화시장에서의 봉제 노동자라는 안정된 직장에서 기술을 배워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그의 바람은 물거품이 됩니다.

평화시장의 노동 현실은 비참하고 처절했습니다.

 

다락방 속 하루

당시 대부분의 공장들은 소규모로 1.5m도 되지 않는 낮은 천장 때문에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태일이 일하던 봉제공장의 2층 모습

 

전태일의 실천

 

1966년 전태일이 통일사에 미싱사로 일할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근무시간은 15시간이 기본, 밤샘 야간작업으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햇볕도 들지 않는 먼지 가득한 작업장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마저도 불안정한 고용환경으로 비수기에는 실업자가 되었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영양실조, 만성소화불량, 신경계통 및 호흡기 질환, 안질 등 대부분의 노동자가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는 건강검진이나 휴가 등의 복지는커녕 병세가 악화되면 해고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노동 착취 현장에서 전태일은 정직한 재단사가 되어 연약한 직공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같은 해 한미사에 재단보조로 취직했고, 곧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올해와 같은 내년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결코 투쟁하련다.

역사는 증명한다."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노동운동의 시작

 

1968년 12월 전태일은 재단사 10명을 모아 바보회(1969.6)를 결성, 바보회의 첫 사업은 노동실태조사를 통해 시청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전태일은 이 일을 계기로 해고당했고, 바보회 활동은 중단됐다.

1970년 9월 기존 바보회 회원을 비롯한 12명의 재단사와 함께 삼동회를 결성해 다시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노동청에 제출한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는 다음날인 1970년 10월 7일 '골방서 하후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보도됐다.

 

전태일의 꿈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1929~2011), 

전태일은 숨은 거두기 전 어머니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겼습니다.

 

유급휴일 실시, 법으로 임금인상, 8시간 근무실시, 정규 임금인상, 정기적인 건강검진 실시, 여성 생리휴가, 이중 다락방 철폐, 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을 요구하며 장례를 거부하며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이 노조를 탄압했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구속하기도 했습니다.

이소선 여사는 아들의 분신 이후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전태일의 분신항거는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학생과 종교계 및 사회가 성명서 발표, 집회 및 농성, 추도식 개최 등의 방법으로 연대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전태일의 분신항거 이후 노동 3권을 봉쇄하려 했으나 YH무역 노조 등은 노동조건 향상,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기간 중 구로동맹파업 등으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나아갔습니다.

 

모범업체 태일피복

 

태일피복은 전태일 열사가 1969년 겨울부터 1970년 봄까지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세금을 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태일피복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전태일이 작성한 사업계획서의 태일피복

가장 핵심은 근로기준법 준수!

 

전태일이 꿈꾸던 태일피복

매주 일요일 휴무로 월 25일 근무, 8루 8시간 근무, 2교대 근무, 태일피복 최소 월급 8,000원 등

 

22세의 어린 나이에 노동운동을 위해 투쟁했고, 분신했던 전태일의 소박하기만 했던 꿈이 불과 50여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엄청난 노동조건의 발전은 전태일 열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 어머니 10주기 특별기획전, 목소리

 

 

오민수의 '철과 피'

매시 정각에 시작하며, 상영시간은 10분 12초입니다.

 

함께하는 목소리, 유가협

 

유가협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로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이래 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다 스스로 혹은 권력에 의해 민주제단에 희생이 된 고인들의 죽음을 계기로 만들어진 모임으로 이소선 여사가 만들었습니다.

 

이소선 여사의 일생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들의 분신을 바라봐오면서 아들의 뜻을 받들어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오신 노동자의 어머니십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소선

대한민국 노동인권가,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전태일의 뜻을 이어 청계피복 노동조합을 세웠으며, 이후 전태일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전태일기념사업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다시는 전태일과 같은 비극이 없기를 바라며 모든 노동자를 위해 한평생 싸웠습니다.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 되어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루어주세요.'

 

(어머니의 말씀 중에서, 신영복 씀)

 

2층은 울림터라는 공연장과 휴게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은 이번 전태일기념관을 통해서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의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감동으로 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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