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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청백리와 두문불출의 황희정승, 파주 황희선생 유적지와 반구정

by 휴식같은 친구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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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와 두문불출의 황희정승, 파주 황희선생 유적지와 반구정

 

 

봄기운이 완연한 주말, 바람 쐬러 자유로를 달렸습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황희선생 유적지를 보기 위해.

 

방촌 황희선생은 세종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명재상으로 황희정승이란 이름으로 후대에 알려졌고, 청백리의 표상이자 두문분출이라는 사자성어의 기원이 되는 인물입니다.

황희정승은 개성출신이지만 87세의 나이에 영의정을 사임하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파주에서 3년 동안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냈습니다.

 

황희선생 유적지에는 황희정승이 말년을 보냈던 반구정방촌 황희기념관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황희선생 묘가 있습니다.

 

포근한 봄날씨에 황희선생 유적지를 찾아 그의 청백리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황희선생 유적지 주차장

 

황희정승(호는 방촌)은 1363년(고려 공민왕 12)에 개성군 가조리에서 태어났으며, 1452년(조선 문종 2)에 파주에서 생을 마감한 고려 말, 조선시대 초기의 청백리의 표상인 명재상이었습니다.

 

황희정승은 조선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인데요.

1363년(공민왕 12)에 태어나 1452년(문종 2)에 사망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자 은거하다가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요청에 응하여 관료가 되었고, 태종과 세종 재위기까지 관직생활을 하며 국방 강화, 예법 정비,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농업 진흥,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 진흥의 지휘감독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세종 대에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8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면서 세종 대의 성세를 이룩한 인물로,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인용)

 

주차장 앞에 한옥이 하나 있는데, 소명재라 적혀 있습니다.

황희선생의 후손들이 이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2012년에 종중의 회의와 행사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황희선생 유적지 매표소 및 입구

 

황희선생 유적지 관람안내

 

관람시간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00

휴무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입장료(관람료) 대인 1,000원, 6~18세/군경 500원

주차장 주차요금 무료

 

황희선생 유적지 안내

방촌기념관과 반구정, 앙지대, 황희선생 동상, 경모재, 방촌영당, 월헌사, 고직사 순으로 관람했습니다.

 

황희선생 유적지

 

가장 먼저 방촌 황희기념관을 관람했습니다.

 

방촌기념관은 황희선생 유적지 성역화 사업으로 2000년 완공됐으며, 황희선생의 일대기와 선생의 삶과 사상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청백리 황희정승

 

평생을 관리로 지내며 원칙과 소신, 관용과 배려를 온몸으로 실천한 정승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청백리로 청빈한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청백리란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의정부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인데요.

 

조선시대에 총 217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맹사성, 황희, 최만리, 이현보, 이언적, 이황, 이원익, 김장생, 이항복 등이 있으며, 그들의 후손들도 혜택을 받았다고 합니다.

 

방촌기념관 전시모습

 

황희정승 관련 유적지

 

1) 방촌영당

방촌 황희의 삶을 널리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황희선생 유적지에 있다.

 

2) 황희 신도비 및 황희선생 묘

정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업적과 일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원래의 신도비와 1945년에 세운 신도비 2개가 파주시 탄현면 금송리에 있다.

 

청백리의 황희정승, 파주 황희선생 묘

 

 

3) 광한루(보물 281호)

전북 남원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으로 1419년(세종 1) 남원에 유배된 황희가 선조인 황감평이 지은 서실을 헐고 다시 누각을 지어 광통루라 불린 누각이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난 곳으로 유명한 곳이며, 강희맨과 심시습, 김종직 등의 시문이 있다.

 

4) 소공대

황희의 은혜를 기리고자 백성들이 세운 비로 강원도 삼척시 노곡리에 있다.

1423년(세종 5) 이곳에 대흉년이 들어 고통받을 당시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보냈는데, 정성을 다한 끝에 이듬해  어려움을 벗어나게 했다.

 

5) 옥동서원

경북 상주에 있으며,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1518년(중종 13)에 백화서원으로 세워졌고 1715년(숙종 41)에 경덕사와 강당을 짓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6) 화산서원 

전북 진안에 있는 서원으로 방촌 황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상주 옥동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1844년(헌종 10)에 옮겨 그린 것이며, 원본 이상으로 우아한 느낌을 줘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7) 창계서원

전북 장수에 있으며 황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곳이다.

1695년(숙종 21)에 세웠으며,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55년에 다시 세워졌다.

 

황희정승의 일화

 

누렁소와 검은소

2마리의 소 중 누가 일을 잘하냐는 질문에 농부가 귓속말로 답한 일화이며, 이를 계가로 미물까지도 이렇게 대하는 농부의 마음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억울한 자백

부인이 숨겨둔 배를 쥐가 먹었는데, 이를 모른 부인은 어린 여종을 윽박질러 죄를 자백받았으며, 이는 억울한 형을 받은 자가 많이 있을 것이라며 억울한 수감자들을 구제한 사건이다.

 

 

종도 역시 하늘이 낸사람

집에서 부리는 노복도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생각하며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황희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이다.

 

야생마 김종서를 길들인 명조련사

정직하고 용기있으나 근무시간을 잘 지키지 않고 낮술에 취하는 김종서를 바로 잡은 이가 황희정승이다.

 

황희정승의 업적

 

철저히 백성을 위하는 행정가

백성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요.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합니다.

 

신뢰받을 수 있는 법치주의

법에 기초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소방서와 파출소의 설치

소방서에 해당하는 금화도감과 파출소와 같은 정수소를 설치했다.

 

인권존중 사상

사람을 대함에 있어 신분을 초월하여 인을 실천하고 인권을 존중했다.

 

승점박억사미 위치지선무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하는데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오제신후사 지수일렴자

우리들 몸이 없어진 뒤의 일은 단지 청렴 렴자 하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황희 연보와 황희와 세종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유래

 

고려가 망하자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고려의 신하 72명이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있는 두문동으로 들어가, 모든 길을 막아 빗장을 걸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유능한 신하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번 설득했으나 허사였고, 그들 72현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황희선생 역시 주문동에 함께 들어갔으나, 왕조가 바뀌어도 백성은 바꾸지 않았으니 백성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문동 선비들의 권유와 설득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때 황희의 나이는 30세였으며, 이후 정조 7년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고려의 충신인 72현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반구정 등 황희선생 유적지로 들어가는 청정문

 

청정문으로 들어서면 좌측부터 월헌사, 방촌영당, 경모재, 황희선생 동상이 있고,

 

우측에는 반구정과 앙지대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앙지대(좌)와 반구정(우)

 

반구정

 

황희정승이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것으로 낙하정이라 했다가,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는 이름의 반구정이라고 지었습니다.

반구정은 황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팔도의 유림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가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습니다.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하다가 1967년에 크게 고쳐지었습니다.

 

반구정이 있는 임진강병으로 군 철책이 있고, 그 너머가 장단면 비무장지대라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어 멋진 임진강 풍경을 담지 못했습니다.

 

앙지대

앙지대는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목조건물로 개축한 것인데, 반구정이 원래 위치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앙지대란 이름은 기경의 호인 호인이라는 뜻을 취해 만들어졌다고.

 

황희선생 동상

 

황희정승 영당 내경모재

황희정승이 세상을 떠나자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방촌선생 영당

 

황희선생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해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한국전쟁으로 불타 없어지자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한 건물입니다.

 

방촌선생 영당이라고 적힌 현판

 

황희정승 영정

 

월헌사

영의정 방촌 선생의 고손인 소양공 월헌 황팽현(1472~1535) 선생의 주를 모셔놓은 부조묘라고 합니다.

소양공은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경기도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소세양, 정사룡과 함께 당대에 이름을 알렸으며, 그의 죽지사는 명나라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월헌사 현판

 

고직사

건물을 지키던 사람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청백리 황희정상을 보니 현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떠오릅니다.

대한민국의 청백리에는 누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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