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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광주시 여행

[여수 이순신장군 유적지] 여수 진남관과 진남관 임란 유물전시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5.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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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진남관은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객사 건물로 임진왜란 이후엔 이순신장군의 수군 본영이 있던 곳인데요.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사용된 조선수군의 중심기지로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현존 국내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된 곳입니다.

 

당시에는 진해루라는 누각이 있던 곳으로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소실되자 1599년(선조 32) 삼도 수군통제사 겸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전라좌수영 건물로 75칸의 거대한 객사를 지어 진남관이라 이름을 짓고 수군의 중심기지로 사용했습니다.

 

후에는 역대 임금의 궐패를 봉안하고 군수가 망궐례를 올렸으며, 국경일에는 군민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716년(숙종 42) 불에 타버린 것을 1718년 전라 좌수사 이제면이 다시 건립한 것이며, 1910년(순종 4)부터 50여 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도 사용된 곳입니다.

 

여수에 있는 대표적인 이순신 유적지로 진남관을 찾았습니다.

진남관 유물전시관을 둘러본 후 진해루(이후 망해루)와 진남관을 둘러봤습니다.

 

진남관 입구에 있는 여수 진남관 유물전시관

 

전시관 내부에는 전라좌수영성, 거북선, 진남관, 철쇄방비시설 모형을 비롯하여 각종 무기류,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유물, 지도 및 서책, 해전 상황을 보여주는 모형, 진남관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수는 이순신장군과 유독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지역입니다.
여수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 본영(이전엔 순천)을 두고 조선 수군을 지휘하던 핵심 군사 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수 앞바다는 남해와 서해, 일본으로 향하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아서 조선 수군의 중심 기지로 삼았고,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 등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덕분에 여수에는 진남관, 선소 유적, 거북선 전시관 등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적지뿐만 아니라 이순신대교, 거북선대교, 충민사 등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명칭과 기념시설이 많은 곳이죠.

 

여수 진남관 유물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00

(점심시간 12:00~13:00)

휴무일(휴관일) 연중무휴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주차요금 1시간 무료, 이후 10분당 200원(1일 5,000원)

 

진남관 1/100 축소모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 충무공 이순신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75칸(정면 15칸 58.8m, 측면 5칸 18.3m, 높이 14.0m)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이라고 명명한 건물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 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년)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데요.

건물면적만 240평으로 지방관아 건물로는 최대 규모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전라좌수영 모습

 

축척 1/200 크기로 제작된 전라좌수영성 모형은 성벽과 남문, 동문, 관아 및 민가와 포구, 해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진남관이 위치한 전라좌수영은 설치 당시 성곽의 둘레가 1.7킬로미터였고, 진남관 외에 80여 동의 건물,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쪽, 동쪽, 서쪽에 성문이 있었고, 남문 밖은 바로 바다와 접해 있었으나 지금은 남문 밖의 바다는 매립되어 시가지로 변해 있습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 줄여서 전라좌수영은 조선 시대 전라도의 동쪽에 존재하던 수군절도사영입니다.

지휘관은 정 3품 당상관인 수군절도사이며, 이름이 좌(左) 수영인 것은 한양에서 남해 쪽을 바라보았을 때 전라도의 왼쪽이기 때문이랍니다.

 

전라좌수영은 1479년(성종 10년) 기존 고려시절부터 있었던 전라도수영을 분리하면서 해남에 있는 수영(전라우수영)에서 독립한 수영이고, 순천도호부의 내례포에 있는 진을 철폐하고 수영을 건설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이순신 장군이 이곳 전라 좌수영의 지휘관 전라좌수사여서 다른 수사들에 비하여 인지도가 가장 높은데요.

임진왜란 ~ 정유재란 사이의 정전 기간 동안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한 곳입니다.

 

이후 이순신이 일시 파직되면서 원균이 후임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가, 그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바가 있죠.

이때 패전으로 전라좌수영 본영의 시설들은 파괴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되었습니다.

 

진남관은 선조 32(1599)에 설치하여 1895년(고종 32) 전라좌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전라좌수영 객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울러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1일과 15일 그리고 나라에 중용한 행사가 있을 때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던 장소였고, 외국의 사진이나 왕명을 받들고 기역을 순시, 방문하는 사신의 연회와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남도 해안에서 일본수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는데요.

1593년 7월 23일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는 삼도 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그가 있던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 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기능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남해안 남동쪽 바다는 수백 척의 함선과 보급선 등을 보유한 일본수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고, 조선수군은 남서쪽 바다인 여수 일대 해역을 방어하면서 일본수군의 서해안 방면 진로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여수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지

 

1) 진남관

2) 고소대

3) 여수 충민사

4) 여수 선소유적

5) 흥국사

6) 여수 영당지

7) 방답진

 

진남관이 걸어온 길

 50여 년 동안 여수공립보통학교와 여수중학교, 야간상업중학원 등의 교실로 활용하다 보니 학생들 졸업사진도 돋보입니다.

 

초기 해전출진도

 

1차 출전 : 옥포-합포-적진포해전(1592.5.7~5.8)

2차 출전 : 사천-당포-당항포-율포적진포해전(1592.5.29~6.7)

3차 출전 : 한산도-안골포해전(1592.7.8~7.10)

4차 출전 : 부산포해전(1592.8.29~9.1)

 

거북선 모형

 

거북선의 내부 모습

 

노량해전-삼도수군총제영이었던 전라좌수영 모습

 

왜교성전투와 노량해전

 

왜교성전투는 정유재란 시기였던 1598년 9월 20일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조명연합수륙군과 일본군이 순천 왜교성과 여수 장도-묘도 일원에서 싸운 전투입니다.

노량해전은 11월 19일 조명연합수륙군과 일본군이 오량해협 및 광양만과 연수반도 동쪽 바다 일원에서 싸운 해전입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왜란 7년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었습니다.

 

진남관 유물전시장 옆은 고소동 천사벽화마을로 이어지는데요.

이순신 장군 유적지인 고소대와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가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은 곳입니다.

 

여수 이순신장군 유적지, 고소대와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타루비

여수 고소동 벽화마을, 오포대와 여수 전망

 

진남관 임란유물전시관에서 나와 진남관으로 향했습니다.

진남관 옆 무료주차장입니다.

 

 

여수 진남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30~16:30

(점심시간 12:00~13:00)

휴무일(휴관일) 연중무휴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주차요금 1시간 무료, 이후 10분당 200원(1일 5,000원)

 

진남관 주차장 한쪽에 가나다 다실 후문이 있는데, 영화 택시운전사 촬영지라고 되어 있네요.

옛날 다방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카페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진남관 입구에 있는 망해루

 

대부분의 조선시대 정자들은 문신이나 지역 사림의 학문과 시문을 읊었던 장소로 활용됐지만, 이곳의 망해루는 수군에 의해 건립돼 적의 해안 침략을 감시했던 초소 역할을 했던 정자입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599년(선조 32) 삼도통제사 이시언 장군이 좌수영 복원 시 진남관과 함께 건립했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있었던 정자로 보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진해루(당시엔 진남관 자리)에서 공무를 봤다는 기록이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망해루는 1664년(현종 5) 이도빈 수사 때 개축됐고, 그 후 1895년(고종 32)은 좌수영이 폐영된 후 1900년을 전후해 철거된 것을 1991년 4월 여수시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앞의 건물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 있지만, 과거엔 이 누각에서 탁 트인 바다를 보기에 좋아 왜적 침입을 감시하게에 좋았을 것입니다.

 

여수에서 너와 나 포토존

 

 

여수에는 충무공의 발자취가 문화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여수 선소 유적’, 충무공의 업적을 기록한 ‘통제이공수군대첩비’, 충무공의 부하들이 세운 눈물의 비석 ‘타루비’,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충무공의 사당 ‘여수 충민사’ 등이 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승려의 몸으로 의병이 된 의승 수군의 중심지 홍국사가 있으며, 충민동 송현마을에는 충무공의 어머니를 모시던 곳이 있습니다.

 

망해루 뒷모습

 

진남관 출입문인 충무문

이순신 장군의 시호인 충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내삼문 역할을 합니다.

 

여수 진남관(국보) 모습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제면 수사가 쓴 진남관 현판이 1953년 보수공사 도중 발견되기도 했다네요.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2년(1599)에 삼군통제사 이시언이 세운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숙종 42년(1716)에 불탄 것을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다시 세운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엔 여수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진남관 앞에 있는 여수석인

 

기단석 위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이 상은 관모를 쓰고 단정한 관복에 두 손을 공수하고 있는 문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석인상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석조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인전술의 일환으로 석인 7구를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데 6구는 사라지고 현재 1구만 남아 있다네요.

 

여수 앞바다 모습

전방에 보이는 다리는 여수의 상징인 돌산대교입니다.

 

진남관 모습

 

진남관의 기단 구성은 정방향의 대지에 크고 작은 장대석을 3~4단으로 쌓고, 그 위에는 다양한 크기의 자연 주초석 70개가 일정치 않은 높이로 놓여 있습니다.

 

주초석 위에는 70개의 민흘림 원형 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붕은 겹처마에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입니다,

 

건물 앞뒤의 안쪽 기둥과 바깥 기둥 사이에는 간단한 들보를 걸었고, 양옆 측면 칸에는 2개의 가로 들보를 설치해 끝부분을 용머리 모양 장식으로 마감했습니다.

기둥은 위아래 굵기가 조금 달라지는 민흘림 형태이며, 지붕을 받치는 구조(포작)는 바깥쪽은 기둥머리에서 두 번 내민 첨차를 사용한 화려한 다포식이고  안쪽은 첨차 대신 간단히 겹쳐 쌓은 익공식을 적용했습니다.

진남과 옆면의 5칸 모습

규모가 상당합니다.

 

바깥쪽 첨차에는 연꽃 봉우리 무늬를 새겼고, 건물 정면 중앙과 모서리 기둥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각 칸마다 화려한 꽃무늬 장식을 두어 외관이 더 아름답습니다.

또한 건물 내부를 넓게 쓰기 위해 일부 기둥 위치를 뒤로 옮겨 중앙 공간을 크게 만들었고, 구조는 단순하지만 튼튼한 부재를 사용해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내부와 외부에는 조선시대의 단청 무늬가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남관 뒤쪽 모습

 

진남관 뒤쪽에서 바라본 여수바다 방향 풍경

 

예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

 

여수시 서쪽 모습

 

진남관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진남관 규모가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대단한 건물 앞마당은 상대적으로 좁은 느낌이 드네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망국으로 향해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이미 목숨을 버렸을 것입니다.

잠시 이순신 장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는 충무공 유적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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