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휴식같은 여행으로의 초대 ♪♩♬~
강원도 여행

[고성 전통마을] 평민들이 살던 당호가 없는 한옥마을, 고성 왕곡마을

by 휴식같은 친구 2024. 5. 1.
반응형

[고성 전통마을] 평민들이 살던 당호가 없는 한옥마을, 고성 왕곡마을

 

 

각 지역마다 한옥과 초가지붕을 이룬 전통마을이 하나씩은 있는데요.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있는 왕곡마을당호가 없는 한옥마을입니다.

 

당호는 집이나 건물에 특정한 의미를 담아 부여한 명칭을 말하며, 보통 '~당, ~헌, ~재, ~누, ~와, ~정, ~실' 등의 한자를 붙여 건물에 편액을 걸기도 합니다.

정약용의 여유당, 류성룡의 충효당, 김안로의 희락당, 신사임당의 사임당, 한명회의 사우당 등을 일컫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통마을은 대부분 양반이 거주하던 마을이라 당호가 있는데 비해 고성 왕곡마을은 평민들이 거주했던 곳이라 당호 없이 '~의 집' 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14세기에 양근(강릉) 함씨 집성촌이 형성된 후 지금까지 600여년을 이어오며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 후손들이 대대로 생활해 오고 있는 고성 왕곡마을 풍경을 담았습니다.

 

왕곡마을 입구에 있는 왕곡마을 저잣거리

저잣거리에서는 전통 차와 수제 조청 등과 왕곡마을 굿즈 등을 제작해 판매하기 위해 조성한 곳인데, 운영은 하지 않고 있더군요.

 

고성 왕곡마을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며, 인근에 송지호와 송지호 해수욕장(1.2km)이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금강산이, 남쪽으로는 설악산이 위치해 있으며, 마을 주변을 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분지형태의 마을입니다.

 

14세기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명인 양근 함씨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낙향 은거했으며, 그의 손자 함영근이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생활해 오고 있는 마을입니다.

 

 

 

왕곡마을의 주민들인 조선시대 내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당호 없이 논건너집, 누렁개집, 큰상나말집 등 이런 식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소박하고 담백한 한옥과 초가가 하물없이 모여 앉아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왕곡마을은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 군락이 원형을 유지한 채 보존되어 오고 있어 전통민속마을로서의 가치를 인정, 2000년에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왕곡마을 저잣거리 모습

저잣거리는 조성된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왕곡마을 저잣거리에서 300여 미터 들어오면 왕곡마을 입구에 장승이 서 있습니다.

 

고성 왕곡마을 안내도

 

당호 없는 석문집, 한고개집, 진부집, 성천집, 큰상나말집, 큰백촌집, 작은백촌집 등을 둘러보면 되고요.

마을엔 오봉교회, 왕곡마을 정미소, 마을회관, 함희석 효자비, 함정균 가옥, 양근 함씨 4세 5효자각 등이 있습니다.

 

왕곡마을 일대 모습

 

마을 입구 주차장에 주차 후 도보로 둘러보면 되는데요.

주민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므로 조용히 둘러보는 에티켓이 필요합니다.

 

마을에는 기와가 20여채, 초가가 30여채 있으며, 행랑채와 부속패 등은 대부분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요,

한국전쟁의 참화와 고성 산불이 일어났을 때에도 온전히 제 모습을 지켜온 마을이기도 합니다.

 

 

 

오음산을 중심으로 5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송지호와 함께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오봉리라 불립니다.

건립연대가 50~180년 된 한옥들이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평면 형식은 온돌 중심 겹집 평면에 마루가 도입된 형태입니다.

 

조선시대부터 면소재지였으며 인구가 증가하면서 1884년에 왕곡마을은 금성, 왕곡, 적동 세 마을로 분리되었는데요.

금성에는 양근 함씨가, 왕곡에는 강릉 최씨, 적동에는 용궁 김씨가 많이 살았습니다.

 

다른 지역 봄보다 늦게 목련과 개나리꽃이 피어 있습니다.

 

김영철의 동네한바퀴에 출연한 마을인가 봅니다.

왕곡마을에 한과를 만드는 한과집 가는 길입니다.

 

양근 함씨 4세 5효자각

양근 함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20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동몽교관을 지내던 함성욱은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7일을 더 살 수 있게 해 나라에서는 조봉대후라는 칭호를 내렸고요.

 

 

 

그의 아들인 인흥과 인홍은 부친 성욱에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일을 더 살게 함으로써 통정대부라는 칭호를 받았고, 또 그의 아들 덕우는 부친 인홍이 병환으로 눕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니 1일을 더 연명시켜 가선대부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희용은 부친 덕우가 병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3일을 더 연명하게 하였고 각각 시묘 3년을 하는 등 한 집안에서 4세 5회 효자가 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4세 5효자각이란 칭하게 되었습니다.

 

성천집

19세기말 함일홍이 성천 사는 부인을 얻어 기와집을 지어서 분가하여 살다가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기와집은 매각하고 60년대 후손 형원이 초가를 짓고 살던 집입니다.

 

목련이 만개한 전통가옥

 

마을 중앙의 개울을 따라 이어져 있는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가옥들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고, 가옥과 가옥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텃밭이 있어서 따로 담이 없고 텃밭을 경계로 가옥들이 분리된 점이 특징입니다.

 

왕곡마을의 전통가옥은 대부분 부엌에 가축우리가 붙은 ㄱ자형 주택을 이루는데요.

안방과 도장방, 사랑방, 마루와 부엌은 한 건물 안에 나란히 배치하고 부엌에 외양간을 덧붙임으로써 겨울이 춥고 긴 산간지방에서의 생활에 편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당호 없이 이름을 적은 가옥 안내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작은 내를 따라 이어지는 마을안길

전통마을 중 왕곡마을처럼 초가집이 이렇게 많이 보존되고 있는 곳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왕곡마을 중앙에 있는 화인당이라고 하는 전통찻집

 

대문없는 전통가옥과 넓은 텃밭으로 각가옥과 가옥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신 뒷마당은 담장으로 둘러쳐서 북서풍을 막기도 하고 남의 시선을 차단한 지혜로움도 숨겨져 있습니다.

 

대문없는 마당

 

대부분 입구 쪽 대문과 담장이 없습니다.

바람과 눈이 많은 지역적 특징으로 햇빛을 충분히 받아 적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초가집도 여럿 있어서 전통마을이란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공터엔 대형 그네가 있습니다.

 

왕곡마을 정미소

 

1968년에 지어져 오랫동안 사용된 근대기 농촌마을의 중요한 공동시설물이자 상징입니다.

이 정미소는 영화 동주 촬영지라고 합니다.

 

마을 앞 논

 

왕곡마을엔 집집마다 굴뚝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특이한 점은 진흙과 기와를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은 굴뚝이 있는데요.

이는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합니다.

 

왕곡마을을 구경할 때 유심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큰상나말집(영화 동주 촬영지)

왕곡마을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ㄱ자형 기와집인데요.

 

19세기말 양근 함씨 함배근이 향목리(상나말)에서 시집온 부인과 결혼 후 부모로부터 분가하면서 이웃마을인 구성리에 있는 폐가를 활용하고 부족한 목재는 두백산에서 벌목하여 북방식 가옥형태의 기와집을 짓고 살던 집입니다.

 

화장실과 헛간, 창고로 사용하는 초가집

 

고성 왕곡마을에서는 전통한옥 숙박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