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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정세권, 북촌 한옥역사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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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한옥마을의 역사는 정세권, 북촌 한옥역사관

 

 

북촌한옥마을에 있는 북촌 한옥역사관은 2021년 삼일절에 개관한 서울시 공공한옥으로 북촌의 형성과정과 북촌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기농 정세권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공간입니다.

 

정세권은 일제강점기 일본식 집이 늘어나는 현실에 위기를 느껴 우리 고유의 주거양식을 지키기 위해 전통한옥을 쪼갠 도시형 한옥을 건축해 보급했고, 덕분에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작은 한옥에 만들어진 한옥역사관이지만, 북촌한옥마을의 역사와 소중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북촌 한옥역사관을 구경해 보세요.

 

북촌 한옥역사관은 안국역에 있는 현대건설 옆으로 난 계동길을 따라 500여 미터 올라가면 위치합니다.

북촌의 도시형 한옥을 살펴보고 북촌 탄생의 역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북촌 한옥역사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10:00~18:00(13:00~14:00 점심시간)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없음

 

북촌 한옥역사관 입구에 있는 석정 보름우물

 

우물은 상수도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20세기 초까지 음수 및 생활용수 공급원이었는데요.

이곳에 있는 석정 보름우물은 상수도 보급 전 북촌 마을 주민들이 이용했던 우물입니다.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 역시 이 지역에서 짧은 사목기간 동안 이 우물을 성수로 사용했습니다.

 

석정보름우물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북촌 한옥역사관이 있습니다.

 

북촌 한옥역사관은 사진에 보이는 정도의 작은 한옥입니다.

좁은 공간에 대나무까지 있어 운치 있네요.

 

전시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는 한옥 내부 모습

 

1920년대 경성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택난이 심화되었고, 이에 일본인들은 일본식 집을 지어 북촌으로 진입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맞서 건축가 정세권은 건양사란 건축회사를 만들어 익선동 한옥마을을 시작으로 가회동, 삼청동 일대에 도시형 한옥을 건설하는 등 경성 곳곳에 한옥인 조선집을 보급했는데요.

이때가 1919년 3.1 운동 이후였습니다.

 

 

 

서대문에서 북촌, 혜화동 일대, 행당동을 잇게 되는 조선집 띠는 이윽고 북악산을 배후로 ㅅ자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한옥마을에서 조선인들은 우리 민족 고유의 일상을 지켜내고 민족문화를 유지, 발전시킨 일제 침탈에 맞선 거대한 문화 방파제가 되었습니다.

 

건축왕 정세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익선동 한옥마을/한옥거리 유래에는 정세권이 있다!

 

1951년의 북촌 서울 한옥마을

 

경성을 조선집으로 지켜 내자!

 

정세권이 짓기 시작한 조선집(도시형 한옥)은 반가 조선집(전통한옥)과는 여러 모로 달랐는데요.

양반 대가집을 산 뒤 필지를 5~6개로 쪼개서 소형 도시형 조선집을 건축했습니다.

 

당연히 조선사람 문화양식에 맞게 맞추는 구조여야 했고, 6인 가족 정도가 살 수 있는 큰돈 들이지 않고 집을 살 수 있게끔 분양가와 전세가가 현실적이어야 했습니다.

 

정세권의 건양주택은 거실을 지면에서 1.8m 정도 높여 습도조절이 잘 되게 했고, 문과 창을 활용해 채광과 보온을 확보했습니다.

수도시설과 하수구, 세탁장과 온돌이 설치된 부엌 등은 집안으로 들여와 위생적으로 꾸몄습니다.

 

대략 이 시기에 함석처마가 등장했는데 지붕과 서까래 길이를 줄여 건축비용을 줄이되 좁은 마당을 비를 맞지 않고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게 한 탁월한 발상이었습니다.

 

전통한옥(북촌 반가 조선집)과 도시형 한옥의 차이점

 

전통한옥은 필지 가운데 마당을 두는 중정형이 많았던데 비해 도시형 한옥은 ㄷ자형 전통한옥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면서 근대식 주택과 같이 건물에 진입하면 현관을 통해 거실로 들어서는 방식으로 구성했습니다.

 

또한 도시형 한옥은 전통한옥과 달리 목재 가공기술을 활용해 얇은 방형 규격 목재를 기둥과 보에 사용했고, 공간배치는 안방을 가운데 두고 양측에 실을 두는 등 건물 내부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구성을 했습니다.

 

기농 정세권 약력

 

정세권은 조선집 건축사업의 성공에 머물지 않고 조선물산을 생산하고 쓰는 일로 나아갔습니다.

1920년 평양에서 시작한 물산장려운동이 일제의 훼방 등으로 꺾이자 조선물산 생산자운동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불씨를 살려내고자 했습니다.

 

 

 

서울 낙원동 300번지(탑골공원 서쪽 옆)에 조선물산 장려회관용 땅을 내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기관지 '장산'을 발행하고 조선물산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조선물산진열관도 만들었습니다.

 

조선집 짓기, 조선물산운동, 신간회 지원 등을 거쳐 이젠 조선말인 한글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힘을 모았습니다.

 

정세권은 1935년 조선어학회에 2층 양옥집을 기증했고, 조선기념출판관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익선동과 가회동, 계동에 조선집을 지어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말을 지키고 다듬는데 바친 것입니다.

 

조선어학회 활동을 지원한 일로 정세권은 재산 대부분을 잃고 1942년 함남 흥원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1943년엔 전시통제경제법률 위반혐으로 동대문경찰서에 갇힌 채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정세권이 빼앗긴 뚝섬(자양동 일대) 토지는 35,000여 평이었으며, 사상범 보호관찰, 집단수용 등 조선인 황민화를 위해 만든 대화숙에 강제 수용되었습니다.

 

정세권은 한국전쟁으로 부상을 입고 1954년 고향인 경남 고성으로 낙향해 정씨 재실에서 살았습니다.

수많은 집을 지었으나 정작 스스로는  빈 집이었던 것입니다.

 

1965년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이후 정세권의 업적을 높이 사 2016년 묘지를 고향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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