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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조선시대 5대 궁궐, 서궐이라 불리던 경희궁

by 휴식같은 친구 2021.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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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대 궁궐, 서궐이라 불리던 경희궁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에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하는 이궁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며 중요한 궁궐도 자리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고, 영조 때 경희궁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부르며 짝을 이뤄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면서 거의 모든 전각들이 철거되거나 이전하며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 개의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며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으로의 복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이 100여채 있었지만, 지금은 7~8채만 복원된 상태)

 

조선시대 5대궁궐, 서궐이라 부르던 경희궁지 풍경을 담았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옆에 위치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입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창건할 때 대궐문으로 세운 건물로 궁성의 동쪽에 동향(현재는 남향)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다른 궁궐의 정문이 2층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흥화문은 1층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경희궁이 이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 박문사의 절문으로 이용되었고, 이후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는 등 수난을 당하며 많은 부분이 변형되거나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흥화문의 원래 위치는 서대문인 돈의문 밖이었던 구세군회관 빌딩(직선거리로 약 1.2km)이 있는 곳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만 했는지 얼추 상상이 갑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인왕산 등산로에 있는 황학정은 후원의 정자였습니다.

 

현재의 흥화문은 1988년 경희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습니다.

 

경희궁(경덕궁)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8:00

휴무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공휴일이 월요일인 경우 정상개방)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입구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이용(기본 1시간 1,000원, 이후 5분당 400원)

관람 소요시간 20~30분

 

흥화문에 들어서면 너른 공터가 나타납니다.

예전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겠죠?

 

옛. 서울 중고등학교 터

 

경희궁 숭정문과 숭정전 앞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광복 후인 1946년부터 서울중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80년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공터로 있는 상태입니다.

 

 

경희궁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로 사용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전각들이 팔려나가 왕궁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경희궁 터에는 현재 서울시 교육청, 기상청(일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복지재단 등의 공공기관과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 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등의 민간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숭전문

 

전각들이 모두 헐어진 상태라 경희궁의 복원된 건물들은 단촐합니다.

입구의 흥화문, 정전인 숭정문과 숭정전, 편전인 왕실의 사당인 자정문과 자정전, 태령문과 태령전 등이 전부입니다.

 

경희궁은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강연장인 흥정당, 독서하는 존현각, 석음각 등이 있었고, 왕후의 침전인 회상전, 정침인 융복전, 대비가 생활하던 장락전, 동서에 별실이 있고 주변에 연못과 죽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용비, 봉상이라는 누각과 연못, 연회장소인 광명전, 집경당 등이 있었습니다.

 

경희궁 숭정문

 

경희궁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며,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경종과 정조, 헌종이 숭정문을 지나 숭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희궁이 훼손되면서 숭정전은 헐려 현 동국대학교로 매각되어 옮겨졌으며, 정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네요.

 

숭정문에서 바라본 경희궁지 모습

 

경희궁 숭정전

 

경희궁의 정전으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에 해당하는 건물인데요.

숭정이란 의미는 정사를 드높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지어졌습니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하거나 궁중연회, 사신접대 등 공식행사가 이루어지던 공간이죠.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당시에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고,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숭정문과 마찬가지로 동국대 정각원 법당으로 쓰고 있으나 너무 낡아서 이 건물은 복원된 것입니다.

 

교실과 체육관으로 쓰이면서 변형이 되었고, 불교식 의례를 행하기 위해 내부가 또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숭정전에서 바라본 숭정문

 

숭정전 앞의 전각들

 

경희궁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자정문

자정은 정사를 돕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 지은 후 화재 한 번 겪지 않고 260년 간 별 탈 없이 존재하다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시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 공사의 자재로 쓸 때 헐렸습니다.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

 

1617~1620(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되었으며, 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곳이었습니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빈전으로 사용했고,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가 헐어냈던 것을 발굴하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시킨 건물입니다.

 

자정전 내부 모습

 

경희궁 태령전 뒤에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인 서암이 있습니다.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 속에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고 합니다.

 

넓적한 바위도 우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궁으로 만들면서 있던 바위를 궁내에 이렇게 놔둔 게 특이합니다.

 

본래는 왕암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지역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瑞巖이라는 한자를 써서 새겨뒀다고 합니다.

현재 서암이라고 적힌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네요.

 

서암이 있던 곳에서 바라본 경희궁 뒤태

자정전과 숭정전이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서암 아래쪽에는 태령전이 있습니다.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인데요.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2000년에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하였고,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본래에는 특별한 용도가 있는 건물은 아니었고, 1744년(영조 20)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이곳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영조의 어진을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태령전 입구인 태령문인데, 출입문은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경희궁은 광해군이 지었으나, 이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했죠.

하지만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당시 창덕궁과 창경궁이 붙타버려서 인조는 즉위 후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습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여러 왕의 즉위식이 열렸고, 숙종과 순조, 경종이 경희궁에서 태어났고, 숙종은 융복전에서, 영조 또한 경희궁에서 승하했습니다.

 

 

경희궁에 오면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험난한 역사를 겪으면서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이렇게나마 복원된 것에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지만, 그래도 조선시대 5대 궁궐이었던 곳이 이렇게까지 능멸(?)을 당했다고 하니 자존심도 무척 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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