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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자 김구 선생이 서거한 곳, 경교장

by 휴식같은 친구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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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이자 김구 선생이 서거한 곳, 경교장

 

 

사적 465호로 지정된 경교장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의 숙소가 있는 곳으로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금광업자로 부호였던 최창학이 1938년에 저택으로 지은 건물을 1945년 11월 23일에 환국하여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할 때까지 3년 7개월간 머문 곳입니다.

 

서울시에서는 이 역사적인 장소인 경교장을 복원하고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조성하여 개방하고 있는데요.

우리 국민에게 근.현대사의 역사를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경교장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경교장은 성균관대학교 강북삼성병원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서거 후 중화민국 대사관 사택으로 이용했고, 한국전쟁에는 미군 특수부대 및 임시 의료진이 주둔했으며, 전쟁 후에는 월남대사관으로 사용했죠.

1968년에 고려병원이 주위에 신축되어 개원했고, 이는 강북삼성병원으로 이어집니다.

 

 

2001년에 서울시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고, 2005년에 사적 465호로 승격되면서 김구 집무실을 부분 복원했습니다.

2010년에야 강북삼성병원으로 사용하던 공간이 이전하고 건물 복원을 거쳐서 2013년에 비로소 시민들에게 개방되기 시작했습니다.

 

경교장은 강북삼성병원과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있는 정동사거리에서 강북삼성병원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경교장은 1945년 11월 23일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수행원 등 1진이 귀국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최창학이 지은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 대신에 근처에 있는 경교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 하였습니다.

 

 

1945년 12월 1일에 홍진 의정원 의장 등 임시정부 요인 2진이 귀국했고, 그해 12월 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국무위원회를 경교장에서 개최했습니다.

1945년부터 48년까지 신탁통치 반대운동 및 남북협상 추진 무대로 활용되고, 1949년 6월 26일에 안두희의 저격으로 김구 선생이 서거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네요.

 

강북삼성병원 진입로 우측에 경교장이 있습니다.

 

경교장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18:00(17:30까지 입장)

(현재 사전예약제로만 운영 10:00, 13:30, 15:00, 16:30)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공휴일 정상운영), 1월 1일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강북삼성병원 주차장 이용(10분당 500원)

 

입구 로비에는 백범 김구 선생 흉상이 있습니다.

 

전시관은 지하 1층부터 2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하 1층에는 경교장의 역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에 대한 내용이 있고, 1층에는 응접실과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이, 2층에는 김구 거실과 침실, 임시정부 요인 숙소와 응접실 등이 있습니다.

 

1층 오리엔테이션실에서 경교장에 관한 5분 짜리 영상을 보고 관람을 시작하면 됩니다.

관람순서는 지하 1층 - 1층 - 2층 순이며, 소요시간은 30분 정도 생각하면 됩니다.

 

지하 1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에는 보일러실과 부엌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3개의 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경교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시관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 약력

1876. 8. 29  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과 곽낙원의 외아들로 출생

1893년  동학에 입문,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선봉장으로 해주성 공격

1896. 3.9  명성황후 시해 복수를 위해 일본군 스치다를 살해, 사형이 확정되나 고종의 특명으로 형 집행이 정지

1898년  인천 감옥에서 탈옥,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 

1903년  교육.계몽운동을 시작

1904년  최준례와 결혼

1911. 7.12  신민회 활동과 안악활동으로 15년형 판결

1915. 8.21  가출옥

1919. 3.29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임명

1924. 1. 1 아내 최준례 사망

1926년  국무령 취임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32년  한국애국단 단장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지휘

1939. 4.26  어머니 곽남원 사망

1940.9.17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1940.10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취임

1945.11~12  환국,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6.10  좌우합작 7원칙 지지성명

1947.12  백범일지 출간

1949. 6.26  안두희에 의해 경교장에서 서거  

 

김구선생 묘와 백범기념관 - 효창공원

 

경교장에서 총탄을 맞을 당시 입고 있던 옷

 

김구 유묵과 김구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

김구 서거 당시 책상 위에 있던 유록과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던 매우사 신부에게 준 태극기라고 합니다.

 

경교장인 이곳은 1938년 최창학이 저택으로 지은 곳으로 죽첨장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곳입니다.

최창학은 일제강점기에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고,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하고 기금을 기부하는 친일행위자입니다.

 

 

1945년 해방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준비를 위해 조직된 단체에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것이 이런 것에 비유하면 맞으려나요? ㅜㅜ

 

경교장은 1930년대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늦게나마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다행이네요.

 

현재의 우리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 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사적 염원을 기반으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공인 민국을 표방하면서 수립된 독립운동의 총지도 기관입니다.

27년간 중국 상해 등 여러지역을 돌아다니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국권회복과 항일정신을 이끌었습니다.

 

국호인 대한민국, 정부조식인 정부와 의회, 정치체제인 민주공화제를 이어받고, 국기인 태극기(1942년~)와 국가인 애국가(1940년~)도 이어받았습니다. 

 

지하층을 관람하고 1층으로 올라갑니다.

 

위 사진은 1층에 있는 귀빈식당인데요.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의 공식 만찬이 진행되고, 김구 선생이 서거했을 때 빈소로 사용되던 공간입니다.

 

그리고 맞은편엔 임시정부 선전부가 활동했던 공간이 있습니다.

선전부는 임시정부의 홍보 및 언론관계를 담당하던 곳입니다.

 

1층에 있는 응접실

국무위원회 등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회의들이 개최되고 김구 주석이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했던 곳입니다.

 

2층 응접실 겸 서재

김구 주석과 국내 정당 대표들과의 회담 및 국무위원회가 거행되었던 공간입니다.

 

당시 응접실에 있는 벽난로를 재현해 놓은 모습입니다.

 

2층 창가 쪽으로 나 있는 복도 모습

 

오토마타 체험실

국무위원회 회의 모습을 재현해 놨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

 

정부 요인들의 숙소는 큰 방 2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김구 선생의 처소

 

건축 원형전시실

임시정부 당시의 욕실로 사용되던 공간으로 벽체와 바닥, 천정, 창문 등이 건축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거실입니다.

1949년 6월 23일, 육군 소위이며 주한미군방첩대 요원인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곳입니다.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두희는 1917년 평북 용천군에서 손꼽히는 갑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나, 북한이 해방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집안이 몰락했다고 합니다.


1947년 빈손으로 월남하여 서북청년회에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8기에 입교했고, 1949년에 졸업했습니다.
현역 육군 소위로 1949년 김구를 살해했죠..

안두희는 미국 방첩대의 정보원 및 요원으로, 우익 테러조직인 백의사의 자살 특공대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부유한 지주집단 출신으로 북한으로 하여금 집안이 몰락하게 되어 월남한 반공정신이 투철한 실향민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구가 반 이승만 세력과 손잡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한다는 황당한 소문과 UN한위 반대, 미국의 1억 5천만 달러 원조 반대 등으로 이승만 정부와 미국과의 갈등이 커졌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무렵,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경교장에 나타나 김구 선생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비서들은 먼저 온 손님과 면답이 끝나자 김구 선생 방으로 안내했고, 불과 몇 분 후인 12시 45분에 요란한 총소리 네 발이 들려왔습니다.
비서진들이 올라가니 안두희는 본인이 그랬다며 총을 내려놓고 있었고, 김구 선생을 적십자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내 숨진 뒤였습니다.

 

재판 당시에는 누구의 지시도 아닌 안두희 자신 단독범행이라고 밝혔는데요.


이후 밝혀진 내용은 백의사라는 단체(단장 염동진)에서 사주를 받아 살해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이승만과 미국이 배후라는 설도 있습니다.
문헌상의 기록은 일체 없는 상태라 이직까지 정확한 배후는 밝혀지지 않고 있고, 심지어 안두희의 심문기록과 재판기록 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김구 살해 후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무슨 이유로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6.25 전쟁엔 석방되어 군대에 복귀, 대위까지 진급했습니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 후 양구에서 군에 납품하는 두부공장을 운영하여 큰돈을 만지나, 4.19 혁명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와 진상을 요구가 빗발치자 도망자 신세에 있다가 잡혔으나 이마저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석방됐습니다.

이런 일례의 내용들을 보면 이승만 정부나 미국의 보호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이후 안영준으로 개명하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2년에 미국으로 도피를 시도했지만, 법무부장관이 출국금지령을 내려 좌절됩니다.
1996년 10월 23일 부천 버스기사 박기서 씨가 '정의봉'이라고 적힌 몽둥이로 때려 80년의 굴곡진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박기서 씨는 사회 각계 인사들의 탄원으로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안두희와 김구 선생의 인연은 1949년 김구가 몸담고 있던 한국독립당에 입당하면서 6회 정도 만남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전에 김구 암살을 목표로 군인 신분으로 정당에 가입했고, 김구 선생과의 인연을 만들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임시정부 주석까지 했던 분을 만나는데 총기 검사도 하지 않고 들어가게 한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위 내용은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에서 참고했습니다.

 

당시 총탄이 창문까지 뚫은 모습이 아직 보존되어 있습니다.

 

깨진 창문 보이시나요?

 

조국의 분단을 막고 국민들의 통합을 주장했던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 선생을 잃은 것만으로 전국민이 애통해했을 법합니다.

김구 선생이 저격당하지 않았다면, 그의 뜻대로 국가가 운영되고 6.25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경교장은 5년 전에 방문하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요.

딸아이가 역사공부하다가 경교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길래 겸사겸사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이나 국민 대부분이 존경하는 백범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비명횡사한 모습을 보니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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