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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의병장 조헌의 서원, 김포 우저서원

by 휴식같은 친구 2021.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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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조헌의 서원, 김포 우저서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사람중봉 조헌 선생이라고 합니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들에도 나온 조헌은 조정에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했던 충신이었습니다.

조헌은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으로 불립니다.

 

중봉 조헌(1544~1592) 김포출신으로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인조 26년(1648)에 우저서원을 짓고, 숙종 1년(1675)에 우저라는 사액을 받았습니다.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고, 1973~76년에 전면 보수되었습니다.

 

늦은 오후에 의병장 조헌을 기리는 서원인 우저서원에 잠시 들렀습니다.

 

우저서원 앞 연못

 

1544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부터 글을 읽으며 뛰어난 자질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22세인 1565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성균관 향교와 파주 성균관 형교 교수로 역임을 했습니다.

 

1572년(선조 5) 홍문관에 있으면서 왕의 불공이 옳지 못하다고 상소를 올려 파면됐고, 1574년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고 공노비와 사노비를 양민화하여 100만 정예병사로 키워가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581년에 종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민폐가 되던 공안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며 이율곡 등과 친분을 유지하였습니다.

1582년엔 보은현감으로 노산군(단종)의 후사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으로 파면, 1586년 공주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기 지키며 정여립 등의 행패를 따졌으나 관찰사가 받아주지 않자 벼슬을 내놓고 옥천으로 갑니다.

 

조헌은 이렇게 철저한 유교적 정신으로 많은 개혁안을 올리고 상소도 하였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나 봅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쓰 겐소를 보내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자 조헌은 이들을 죽이라고 청했으나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고, 왜군을 대비하라고 상소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방으로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는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들이 흩어지자 남은 700명으로 금산에서 역전 분투하였으나 왜군의 수에 밀려 손해만 주고 조헌과 의병 700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조헌의 묘소는 옥천에 있다고 합니다.

 

 

1604년(선조 37)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에 그의 사당에 표충이라는 액을 하사하였으며, 1754년(영조 30)에 영의정으로 추증, 1883년(고종 20)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죽어서 상을 내리면 뭐하나요?

그의 충언을 들었다면 왜군에게 이렇게 무참히 짓밟히지는 알았을텐데 말입니다.

 

우저서원 외삼문 모습

 

김포시 감정동에 자리한 우저서원은 이러한 중봉 조헌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입니다.

원래 우저서원이 있는 자리는 조헌의 생가가 있던 자리로 1617년에 유허비를 먼저 세우고, 1648년에 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오후 6시 가까이 가니 문이 닫혀 있었지만 담장이 낮아 안쪽 건물들은 밖에서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주차장은 우저사원 앞에 무료주차장이 있습니다.

 

우저서원은 학문의 공간을 앞면에, 제례의 공간을 뒷면에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구조로 공간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위패를 봉안한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 사진은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중앙에 여택당이라는 공부하는 공간입니다. 

 

여택당 동쪽에 위치한 동재 모습

동재와 서재는 공부하는 학생들이 머물던 공간을 말하는데, 주로 동재에는 양반자제가, 서재에는 평민자제가 기숙했다고 합니다.

 

서재가 있는 서쪽 담장 모습

 

동재와 서재, 여택당을 지나면 제례공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이 보입니다.

 

가장 위쪽에 있는 조헌의 사당입니다.

 

사당에는 조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집'을 비롯하여 '정금록', '원생안', '개현비사적기' 등의 문집이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해마다 봄 2월 중정일과 조헌의 기일인 음력 8월 18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당 동쪽에 세워진 조헌 선생 유허추모비(유형문화재 90호) 모습이네요.

 

사원 뒤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보호수(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냥 봐도 고목의 자태가 느껴지는데, 한쪽은 모두 잘린 상태네요.

 

느티나무에서 바라본 우저서원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처럼 조헌도 왜군의 침입을 직감하고, 조정에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선견지명이 있던 의병장이었네요.

선조 대에 이런 충언을 받아들이고 왜군의 침입을 막아냈다면 잿더미로 변한 우리의 문화유산은 정말 찬란했을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우저서원에서 바라본 김포평야 모습

 

우저서원 뒤쪽으로는 조헌의 부모, 백부, 조부모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정작 본인은 전사한 충청도 옥천에 묻혀 있답니다.

 

중봉 조헌 선생은 의병장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대기에서 보는 것처럼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이며, 평생을 직언으로 일관한 절개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국내외 상황을 명확히 판단하고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자는 주장을 펼쳤던 선구자적 안목도 가지고 있었네요.

 

이이의 철학을 계승하여 여러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의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과 송시열,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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