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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안중근의 생애를 기억하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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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생애를 기억하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며칠 전 남산공원에 방문해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관람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 말 풍전등화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조국의 나아갈 길을 밝힌 우리 민족의 영웅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고,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다 보니 안중근 의사를 모르는 국민은 없을 테지만, 그의 대한 자세한 일대기와 독립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딸아이의 역사교육에 나오는 곳이라 일부러 예약하고 다녀왔는데, 저 역시도 안중근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기념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산공원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대해서 적어 봤습니다.

 

남산공원에 있는 안중근의사 동상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는 안중근 의사가 적은 글귀가 적힌 석상들이 있습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일신상의 이익을 당하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함에 처하면 목숨을 바친다)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 지정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안중근의 애국심과 의병장(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으로서의 위엄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비석 옆에는 와룡매임진왜란 당시 창덕궁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묘목의 후계목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한국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담아 400여년 만에 환국한 매화나무입니다.

 

 

이 매화나무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반출되었고, 다테가의 보리사인 마츠시마의 즈이간지 본당 앞 옆에 홍백으로 식수되어 화려한 꽃을 피우며 이 사찰의 유명한 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찰의 주지가 안중근의사숭모회에 순국 89주기를 맞아 반환을 제의해 왔고, 이에 허락하여 남산공원에 홍매화 1주, 백매화 1주가 심어져 있습니다.

 

푸른 가을하늘의 남산서울타워 풍경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3~10월 10:00~18:00, 11~2월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연휴

입장료 무료

주차장 남산공원 유료주차장 이용

 

남산공원 주차장 정보

 

코로나로 인해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어서 사전에 예약하고 그 시간에 방문해서 관람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하 1층에는 제1 전시실이, 1층에는 제2 전시실, 2층에는 제3 전시실이 있습니다.

 

입구로 들어서면 참배홀이 있습니다.

사형집행 당하는 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하얀 수의를 입은 안중근 의사의 좌상과 11명의 애국투사들의 단지동맹 때 약지손가락을 자르고 적은 태극기에 적은 대한독립이라는 글자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안중근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영웅입니다.

처음에는 계몽운동을 하다가 1907년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한국 침량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대한국인 안중근

 

안중근의사의 말씀 80자를 붓 대신 작가의 손으로 한 자 한 자 그려 넣은 작품입니다.

청색의 산은 한반도의 푸른 기상과 안중근의 평화정신을, 단청색의 글자는 안중근의 말씀이 우리가 꿈꾸는 평화로운 지구촌을 희망하는 염원을 담았다고 합니다.

 

제1 전시실, 안중근의사의 동판과 그의 유서가 적혀 있네요.

 

안중근의사의 생애, 천주교 입문, 해외망명, 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에 관한 전시내용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과 조성녀(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1세에 말타기와 총쏘기에 재능을 보였고, 15세에 결혼하였으며 부친 안태훈이 일으킨 의려의 선봉장으로 동학 공격을 물리칩니다.

 

 

1897년 18세에 프랑스 빌렘 신부로부터 천주교 영세를 받고 천주교 입문했습니다.

천주교 전도 활동하면서 대학설립에 뜻을 가지기도 했고,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 등으로 나라가 위기를 맞자 국외 망명을 단행했으며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한 그는 의병모집을 모아 의병부대를 창설했습니다.

의병부대를 지휘해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여 여러차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슬리를 거두었습니다.

 

1909년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단지동맹을 맺고 의병 재기 의지를 다져 나가는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9년 10월 26일, 거사를 감행했습니다.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은 아이, 안응칠

아기 안중근의 가슴과 배에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점 7개가 있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명으로 응칠이라 지었습니다.

 

1894년 안중근은 김아려와 혼인을 올리고 성년이 되어 본명인 안중근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가문의 독립운동

 

안중근 사후에 친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은 러시아로 망명해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큰 활약을 했습니다.

사촌동생 안명근은 친일 대신들을 처단하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습니다.

 

그 외 안장근, 안경근 등 사촌동생들과 안봉생, 안진생, 안춘생 등 조카들도 만주 독립군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구국의 대의를 이어간 가문

 

얼핏 세어 봤는데 안중근 가문에서 받은 훈장만 해도 15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가문이 아닐 수 없고, 이런 집안이 구국의 명문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 사촌동생인 안명근의 독립운동 활동 내용입니다.

일가족 모두가 나라를 위해 싸운 그 기개 정말 대단하며 영원히 기억하여야 할 이유네요.

 

 

안중근 의사의 건국훈장 중 최고의 단계인 대한민국장 모습

 

그리고 그의 가문에서 받은 훈장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학교설립과 교육운동

 

안중근 의사와 천주교

 

1894년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을 진압하면서 노획한 양곡 5백석을 군량미로 전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프랑스인 신부가 도움을 줘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이때 천주교에 입문하여 교리를 전파하였고, 가족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입문 후 프랑스 빌렘 신부를 수행하면서 전교활동에 헌신하였고, 순국할 때까지 변함없는 신앙심을 가졌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을사늑약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는데, 일제는 전쟁의 명분으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이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자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말았습니다.

 

안중근은 아버지와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방도를 찾았고,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1905년 6월에 중국으로 출국하였습니다.

 

해외망명 계획과 상하이 사찰

 

안중근은 한국인이 많이 살던 산둥 일대를 둘러본 후 상하이에 가서 동포들을 만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관심 속에 냉담한 반응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상하이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진남포로 이사, 교육사업에 투신했습니다.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에 치중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과 안중근의사

 

1907년 초 국내외 애국지사들은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국채를 모금으로 갚자며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 설치를 주도하는 등 모범을 보이며 전 가족의 장신구를 헌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해외 망명길에 오른 안중근의사 - 북간도

 

제2 전시관안중근의 해외활동과 의병투쟁, 동의단지회 조직 등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문제로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과 계몽운동으로 국가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습니다.

한인 마을을 돌며 의병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중근의사는 크라스키노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진입작전을 벌였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높아가던 연해주 한인사회의 항일열기는 이범진의 군자금 지원으로 의병운동을 발전했는데요.

1908년 4월 연해주 각지의 의병운동가들이 최재형 집에 모여 항일의병 결사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안중근의사는 동의회의 발기인과 평의원에 선입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의병부대의 국내진입은 두 차례 진행되었습니다.

1908년 6월과 1908년 7월인데, 모두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두 번째 전투에서는 다수의 일본군을 포로로 생포했는데,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부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두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위치가 탄로 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는 분열하고 안중근은 간신히 크라스키노로 귀환했다고 합니다.

 

만국공법에 의한 포로 석방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를 반대하는 부하들의 말을 따랐다면 더 많은 전적을 이루었겠지만, 안중근의 신념은 만국공법에 따라야 하는 인도적인 부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동의단지회 취지문

 

안중근 의사가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자른 손가락과 피를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혈서로 쓴 글을 엽서로 만든 것입니다.

 

단지동맹을 맺으며 혈서를 쓴 내용은 영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제3 전시실하얼빈에서의 거사와 법정투쟁, 옥중 남긴 글 그리고 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얼빈 의거 계획과 의거 추진에 관한 내용입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대신을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습니다.

 

하얼빈역 의거 현장 모습

 

의거 현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 6발을 쏜 장면 

 

하얼빈 의거를 보도한 세계 각국의 신문

 

역사적 의거결행, 1909년 10월 26일 09:20에 하얼빈역 도착, 09:30에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인물로 1885년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개설을 주도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한국에 통감부 설치해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죠.

이후 안중근 의사의 거사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상

 

안중근 의사의 불법 인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강압에 의해 불법적으로 일본총영사관에 신병이 인도되었습니다.

11월 1일 하얼빈에서 출발하여 뤼순감옥에 수감, 일제 법원은 민선 변호인을 금지하고 언론도 봉쇄한 채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언도되었고, 3월 26일 의거일 이후 5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법정 투쟁

 

일제는 불법적으로 심문, 재판을 진행했으나 안중근은 전혀 굴하지 않고 일제의 한국 침략과 동양의 평화를 교란한 이토의 죄상을 밝히며 의연하게 투쟁하였습니다.

 

안중근의사 법정 진술을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적은 그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

 

1909년 12월 13일 옥중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3월 15일에 탈고한 저서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순국 전까지 삶의 역정, 독립투쟁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32년의 짧은 인생은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한 안중근의 모습이 육필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했던 뤼순감옥의 공간을 재현해 놓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이란 책을 쓰다가 탈고를 못하고 사형을 집행 당해야만 했습니다.

동양평화론을 작성하기 위해 뤼순교도소장에게 사형집행을 늦춰달라고 요청했지만, 묵살당하고 17페이지만 적상했으며 당시 일본인 간수가 동양평화론을 보며 감명받아 날을 새어 가며 배껴 쓴 것이 지금의 동양평화론이라고 합니다.

 

현재 유럽연합이 있듯이 100년 전 안중근 의사는 동양의 유럽연합을 꿈꾸던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 시모시자

조마리아 여사 역시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여걸입니다.

 

사형언도 후 안중근 의사

 

남겨진 안중근 의사의 유서

 

안중근의사 순국

 

안중근의사 숭모시문

박은식, 김구 선생, 쑨원, 이강, 계봉우의 글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관계를 맺은 인물들

 

기획전시실에서는 안중근의 옥중 유묵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화로 제작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안중근 의사만큼은 민족의 영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의 32년 짧은 인생 모두를 나라를 위해 헌신한 진정한 영웅임에 트림이 없네요.

 

이런 독립운동가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해방과 현재의 번영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의 교육 장소로 유용한 곳이기도 하지만, 성인들이 방문해도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유익한 전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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