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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서울 눈내린 날 풍경, 창덕궁 및 낙선재 설경

by 휴식같은 친구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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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눈내린 날 풍경, 창덕궁 및 낙선재 설경

 

 

지난 주말 서울엔 보기 드물게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12월 기준으로 12cm의 눈이 내려 42년 만에 최대 적설량을 보인 것입니다.

그것도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해 오후까지 이어지며 날씨까지 포근해서 설경을 구경하기에 너무나 좋았답니다.

 

서울에 온지 20여년, 그동안 보지 못한 설경을 그냥 보낼 수 없어 고궁나들이를 나왔는데요.

길상사에 들린 후 차를 돌려 창덕궁으로 향했습니다.

 

함박눈이 내린 서울 눈 내린 날의 창덕궁 설경과 함께 이번에는 낙선재를 자세히 관람했습니다.

 

사무실에 주차한 후 창덕궁 가는 길

 

곳곳에 눈이 쌓이면서 차량도 드뭅니다.

다만 포근한 영상 날씨라 많은 눈이 내렸지만 금세 녹으면서 싸인 날씨였습니다.

 

설국으로 변한 창덕궁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에는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과 함께 5대 궁궐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조선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며 정사를 펼쳤던 궁궐이 창덕궁입니다.

 

1405년(태종 5)에 경복궁 이궁으로 지어진 창덕궁 그리고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며 하나의 궁역을 이룬 경희궁이 붙어 있습니다.

 

창덕궁은 조선 궁궐 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자연과 조화로운 배치, 한국 정서가 가장 많이 담겨있는 궁궐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관람안내

 

관람시간 2~5월/ 9~10월 09:00~18:00, 6~8월 09:00~18:30, 11~1월 09:00~17:30

(입장마감은 1시간 전)

휴궁일(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료(입장료) 25~64세 3,000원, 그 외 내국인은 무료

(후원은 별도 예배, 성인 5,000원)

주차장 주차요금은 기본 30분 1,500원, 추가 10분당 500원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보물)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9년 광해군 때 복원된 2층 전각입니다.

당시에는 돈화문에 큰 종이 설치되어 매일 정오와 오후 10시에 종을 쳐 시간을 알렸다고 합니다.

 

창덕궁 입구에 있는 보호수

검은 나무줄기에 하얗게 내려앉은 설경이 무척 예쁘네요.

 

매표소에서 매표 후 창덕궁으로 들어섰습니다.

영상 1도의 날씨에 함박눈이 내리자 고궁나들이 나온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더군요.

 

단풍나무와 소나무에 내려앉은 눈

눈꽃까지는 아니지만 소복소복 내린 눈이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서울에 있으면서 이런 설경을 보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내리다 보니 이런 기회가 생기네요. ㅎㅎ

 

창덕궁 금천교의 설경

 

창덕궁 금천교는 1411년(태종 11)에 축조된 돌다리로 창덕궁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에 있는 금천에 만들어진 돌다리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교각을 2개의 홍예로 구성하였는데 물속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홍예를 틀었으며 양쪽 교대를 석성처럼 쌓았습니다.

 

창덕궁 입구 우측에 있는 내병조

창덕궁에 여러 번 왔지만 처음으로 가본 곳입니다.

 

내병조는 궁궐 안에 있는 병조란 의미인데요.

내병조에서는 대궐 안 각 문의 자물쇠를 관리하고 임금이 행차할 때 가마를 선도하며 시위나 의장 때 질서를 잡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내병조 내부 모습

지금은 창덕궁 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더라고요.

 

서울 눈 내린 날 창덕궁 어딜 보나 하얀 세상이 되었습니다.

 

진선문 밖에 궐내각사가 있는데요.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잇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습니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 대유재,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에 선원전 등이 있습니다.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습니다.

궐내각사는 구경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창덕궁 나들이 - 돈화문, 인정전, 대조전, 선원전, 희정당

 

창덕궁 진선문

 

진선문은 창덕궁의 중문으로 조선 태종 때는 백성의 억울함을 알리는 신문고가 설치되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했습니다.

 

인정전 인정문 앞마당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직사각형 마당이며, 마당을 빙 둘러 호위청, 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는 곳입니다.

 

어찌나 눈이 많이 내렸는지 관람객들이 곳곳에 커다란 눈사람을 여러 개 만들어 놓았네요.

포근한 날씨라 눈도 잘 뭉쳐집니다.

 

창덕궁 인정문

 

창덕궁 인정문은 이궁인 창덕궁의 정전이면서  300년이나 조선의 정사를 다루어 온 인정전의 정문으로 보물로 지정된 곳입니다.

1405년 태종이 창덕궁을 지으면서 건립한 문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광해군 때 복원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494년 연산군이 인정문을 지나 왕위에 올랐고, 이후 1649년(인조 27) 효종, 1659년(효종 10) 현종, 1724년(경종 4) 영조, 1800년 순조, 1849년 철종, 1863년 고종이 인정문을 지나 인정전에서 임금자리에 오른 유서 깊은 곳입니다.

 

창덕궁 인정전

인정전의 앞마당에는 박석을 깔았고 아래에 정일품에서 종 9품까지의 품계석이 줄지어 서 있고,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모습입니다.

 

창덕궁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며 국보로 지정된 곳입니다.

태종 이방원이 거처할 이궁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적각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 2)에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봤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죠.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되고 말았으며, 이듬해 1804년(순조 4) 다시 건립되었습니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인정전 앞에서 바라본 창덕궁 설경

 

창덕궁 인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2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며, 용마루에 한말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정전 내부 모습

 

조선시대 왕들이 창덕궁에 오랜 기간 머물렀었기에, 인정전은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 역사적 현장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왕의 즉위식과 왕비의 책봉례가 거행된 것은 물론이고, 연산군대에는 광대들을 동원하여 이곳을 사치와 유희의 공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온종일 비가 쏟아지던 날, 선조가 인정전에서 말을 타고 피난길을 나서기도 했으며, 인정전에서는 간혹 종친과 노인들을 불러 잔치가 베풀어지기도 했으며,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인정전 옆 돌담 풍경

 

인정문으로 다시 나와 후원 쪽으로 향하면 창덕궁 숙장문을 만납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이 숙장문입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며,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습니다.

 

희정당과 대조전이 있는 앞마당

 

소나무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인정전

 

소나무 설경

 

좌측으로 가면 창덕궁 후원이 있고, 우측으로는 낙선재가 있습니다.

낙선재는 그동안 제대로 관람한 적이 없어서 이번에 자세히 관람을 했습니다.

 

 

 

창덕궁 후원 풍경은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창덕궁 후원 - 부용지와 주합루, 애련지와 의두합, 연경당

창덕궁 후원 - 존덕정과 펌우사, 옥류천

 

창덕궁 낙선재 가는 길

 

낙선재 일원

 

온통 하얀 세상~

너무 아름답습니다.

 

소나무에 하얀 눈이 쌓인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온통 눈 세상

 

낙선재 일대는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가 있으며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공간은 물 사이에 행랑과 담을 설치하여 공간을 독립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원래 낙선재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하고 있어 청덕궁으로 입장해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낙선재는 24대왕 헌종(1827~1849, 재위:1834~1848) 대에 조선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개혁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후궁인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 순원왕후와도 관련이 깊은 공간입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고종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등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낙선재란 이름은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순 임금의 고사에서 유래했으며, ‘선을 즐거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창덕궁 낙선재(보물)

 

낙선재는 헌종이 정조를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로 세웠는데요.

정조는 즉위 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하였는데, 이때, 규장각의 2층은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는 주합루였습니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을 건립하며, 바로 연접하는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승화루)를 세워주었는데, 헌종은 낙선재를 바로 이 소주합루에 기대어 그 옆쪽에 건립한 것입니다.

 

낙선재는 왕이 책을 읽고 쉬는 공간, 즉 서재 겸 사랑채로 조성했습니다.

정면 6칸, 측면 2칸에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가 딸려있는 ㄱ자형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여느 궁궐 내 침전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 가옥 형식으로 건축했습니다.

 

국상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는 공간이었다고도 전해지고요.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되었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순종이 머문 곳이기도 합니다.

 

1963~1970년 영친왕 이은, 1966~1989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가 기거한 곳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낙선재 현판

 

낙선재 내부 모습

 

낙선재 가장 좌측 방은 누마루로 앞으로 돌출시켜 만든 것이 특징이며, 안쪽 온돌방으로 가는 출입문이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채로운데요.

만월문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석복헌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11일, 헌종은 낙선재 동쪽에 석복헌을 중건했습니다.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석복헌은 후궁인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은 전각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26년 순종이 영면한 후 석복헌에서 생활하였고, 1966년 그곳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창덕궁 수강재


정조 9년(1785)에 지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 자리에 세워 수강재라 이름 붙였습니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익종)의 별당이었으며, 헌종 14년(1848)에 헌종의 할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하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귀국한 1966년부터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며,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합니다.

 

창경궁 방향 담장

 

창경궁 나들이(조선궁궐)

 

낙선재 일대 앞마당 설경

 

창경궁 사각당이라고 합니다,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 뒤쪽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꾸민 후원입니다.

그리고 담 너머가 청경궁이죠.

 

꽃담 너머로는 창경궁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 등의 창경궁 권역의 정자들이 있습니다.

 

낙선재 누마루 만월문 반대(온돌방)에서 본 모습

 

낙선재에서 나와 희정당과 대조전 일원으로 이동했습니다.

 

희정당 옆에 있는 보춘정

창덕궁의 약방으로 사용하던 전각입니다.

 

창덕궁 희정당(보물)

 

희정당은 조선후기 임금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창덕궁의 편전은 본래 선정전이었는데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희정당은 1496년(연산군 2)에 궁내의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습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입니다.

 

창덕궁 대조전(보물)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인데요.

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으며,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입니다.
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창덕궁 대조전 옆 공터
 
이 공터는 태화당, 재덕당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데, 1908년 이후에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태화당, 재덕당의 기록은 많지 않으나 아래 보경당처럼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터 위는 보경당 터입니다.

보경당은 선정전과 함께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던 편전으로 이용했다고 하며, 때론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17세기 이후에는 후궁들이 머물기도 했습니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가 보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집니다.

 

창덕궁 선정전(보물) 뒷모습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이며 조선시대의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행하던 곳으로 창덕궁이 건립되던 초기에는 조계청이라고 불렀다가 세조 즉위 7년인 1461년에 선정전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선정전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조선 중기 역사의 질곡을 함께한 건축물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1647년 인조 때 중건되었습니다.

건물은 둘레에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담장이고. 정면으로는 어로인 복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선정전은 현존하는 궁궐의 전각 중에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인데요.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로 이루어진 건물로, 고주를 앞뒤로 갈라놓지 않고,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앞에만 고주를 세워 툇간이 앞면에만 마련되었습니다.

 

 

서울에 함박눈이 내리던 날을 고대했는데, 이렇게 고궁의 설경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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