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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창경궁 나들이(조선궁궐)

by 휴식같은 친구 2021.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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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나들이(조선궁궐)

 

 

오랜만에 지난 주말, 창경궁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6년 전에 창경궁 야간개장을 했을 때 다녀오고 처음이었습니다.

 

관람일 당시 미세먼지는 있었지만, 4월 기온에 해당하는 포근한 날씨라 나들이하기 좋았습니다.

딸아이가 이제 5학년이 되다 보니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아 요즘은 나들이할 때 주로 역사유적에 관계된 곳을 주로 다니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이면서 창덕궁 별궁으로 만들어진 창경궁 풍경을 담았습니다.

 

창경궁서쪽으로 창덕궁, 남쪽으로는 종묘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아버지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후 수강궁이라 명명했는데요.

1483년(성종 14)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인 것입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당시 창덕궁과 함께 큰 피해를 보았고, 당시 법궁이었던 창덕궁보다 7년 앞서 재건됨으로써 법궁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고, 숙종 때의 사화들(장희빈 처형, 노론과 소론의 대결), 영조 때의 사도세자의 변고 등의 큼지막한 사건들도 많이 일어난 궁궐입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일제는 1909년 궁내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고,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습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일제는 남아 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기도 했죠.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건립하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설치하여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 밭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창경궁은 해방 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이용되다가 1981년 정부에 의해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습니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종묘와 창경궁을 단절시킨 도로, 율곡로는 터널로 조성하여 그 위로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는 복원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는 상태입니다.

늦게나마 이렇게 단절된 궁궐이 이어진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네요.

 

종묘와 창경궁 담장 보행로

시점부와 종점부의 복원된 조감도입니다.

 

창경궁 관람안내

 

창경궁 관람시간 09:00~21:00

예전에는 경복궁과 창덕궁처럼 18:00까지 운영하다가, 이젠 상설 야간개장으로 밤 9시까지 관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표는 마감 1시간 전인 20:00까지 가능합니다.

 

휴무일 매주 월요일

 

 

창경궁 관람료 만 25~64세까지는 1,000원이며 그 외 연령대는 무료관람입니다.

외국인의 경우 19~64세는 1,000원, 7~18세는 500원, 그 외 연령대는 무료입니다.

국가유공자, 장애인, 복지카드 소지자 등은 무료관람이며, 생활한복이나 전통한복을 입으면 역시 무료관람할 수 있습니다.

 

창경궁 주차장 주차요금기본 30분에 1,500원, 초과 10분당 500원으로 1시간에 3,000원입니다.

 

보물 384호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입니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라고 합니다.

 

창경궁에는 국보인 명정전을 비롯하여, 홍화문, 명정문 및 행각, 옥천교, 통명전, 풍기대, 관천대, 팔각칠층석탑 등 7개의 보물이 있습니다.

 

보물 386호인 옥천교에서 바라본 모습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하였습니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보물 385호인 명정문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입니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포작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국보 226호인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입니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어,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습니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죠.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서는 공간입니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습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고 합니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보입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하죠.

 

명정전 천정에 그려진 그림은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네요.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습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명정전에서 바라본 품계석이 있는 마당 모습입니다.

 

명정전 남쪽에 위치한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입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 후 뒤주는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 안뜰로 옮겨졌고,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굶주림과 더위에 신음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하죠.

 

문정전 내부 모습

 

명정전 뒤에는 숭문당이 있습니다.

 

숭문당은 글자 그대로 문을 숭상한다는 의미로 국왕의 경연을 벌이던 곳이며,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던 곳입니다.


숭문당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으며, 순조 때(1830년) 화재로 불탄 것을 그 해 가을에 재건하였으며, 숭문당 현판과 내부에 걸려있는 일감재자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숭문당 뒤편 공터 모습

 

그리고 그 옆으로는 함인정이 있습니다.

 

함인정 자리에는 1484년(성종 15) 인양전이란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이후, 함인정은 1633년(인조 11)에 건립되었고, 1830년(순조 30)에 불타 없어졌다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함인정은 국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으며, 영조가 문·무과에 합격한 사람들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고 하네요.

함인정 앞에 있는 오래된 향나무

살아있는 것이 힘겹게 보이네요.

 

남쪽으로는 종묘와 연결되는 공간입니다.

현재는 공사 중이라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 종묘와 종묘제례

종묘 설경(눈내린 종묘풍경)

 

이곳은 동궐도에 나와있는 동궁일원이라고 합니다.

 

왕세자가 거처하던 곳으로 관천대 서쪽에서 창덕궁 낙선재 일원까지를 동궁일원이라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아예 없답니다.

이곳은 세종 때 만든 수강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동궁일원 동쪽에 자리한 보물 851호인 관천대

 

문정전 앞쪽에 있으며,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를 설치했던 시설입니다.

최근에는 시간을 측정하던 일성정시의를 설치했던 시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일제 때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것을 창경궁 정비 사업 때 제자리로 옮겼습니다.

 

동궁터에서 바라본 명전전이 있는 궁궐 모습

 

또 다른 향나무

 

향나무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이자 부정을 씻어주는 나무라는 인식으로 궁궐을 비롯한 사대부의 정원, 유명사찰, 우물가에 주로 심어졌습니다.

동궐도에서도 나와있는 이 향나무는 200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한복을 입은 관람객들도 보여 궁궐과 잘 매칭이 되어 보이네요.

 

서쪽 담벼락과 맞닿은 곳은 창덕궁입니다.

 

아직까지 함양문을 통해서 창덕궁으로 갈 수 있는데, 종묘와 연결이 된다면 하나의 관람권으로 모두를 관람할 수 있도록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경궁 환경전

 

환경전은 창경궁의 내전 건물 중 하나로 세자나 국왕이 생활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종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6년(광해군 8)에 중건되었다가, 1830년(순조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순조 34)에 다시 중건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는데,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 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고 하네요.

 

창경궁 경춘전

 

경춘전의 경춘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으로 1484년(성종 15) 창건 당시에 건립된 침전 건물로 주로 왕대비, 왕비 또는 세자빈 등이 거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습니다.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고, 이곳에서는 22대 정조와 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한씨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헌경왕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한 곳입니다.

 

통명전과 양화당

 

창경궁 양화당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 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입니다.

 

보물 818호 창경궁 통명전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입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습니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네요.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습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됩니다.

양화당 옆에는 바닥에 거대한 암석이 있습니다.

궁궐을 만들면서 너무 거대한 암석이다 보니 그대로 두고 조성한 곳으로 보입니다.

 

이곳은 영춘헌과 집복헌입니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입니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재건되었습니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 11) 1월에 사도세자, 1790년(정조 14)에 6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합니다.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으로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였습니다.

 

위쪽으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자경전 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창경궁 모습입니다.

 

자경전 터는 전망 좋은 곳으로 대비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곳입니다.

 

자경전은 1777년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앞쪽으로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향하도록 지었으며, 뒤편에는 아름다운 계단식 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통하는 함양문입니다.

창덕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별도의 입장 매표를 해야 합니다.

 

조선 5대 궁궐 중 임금이 가장 오래 머문 궁궐, 창덕궁의 겨울이야기

 

보물 847호 풍기대

 

풍기대는 영춘헌과 집복헌 뒤 언덕 위에 세워져 있으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세웠던 풍기의 받침대입니다.

1770년(영조 46)에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창덕궁 통제문 안에 설치되었다가 해방 전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

 

양부일구

양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만들어진 천문의기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해시계입니다.

 

성종대왕 태실 및 성종대왕 태실비

 

산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데, 성종의 태를 묻어놓았던 태실과 그 제작과 수리 기간을 적은 태실비가 있습니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손이 태어나면 명당지를 찾아 태항아리를 묻어 보존하였는데요.

 

 

1928년에서 1930년 사이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왕실 가족의 태실 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이봉하였습니다.

이때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대왕의 태실 석물을 1928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춘당지로 가는 길엔 내전 터 일원이 나옵니다.

 

궁궐 여성들의 처소가 그득 들어있던 생활공간이었죠.

요화당과 취요헌은 효종이 공주들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고, 통화전은 혼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1930년대에 일어난 화재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일대 모든 내전들이 사라졌습니다.

 

창경궁 춘당지

 

이 연못은 춘당지라 부르는 연못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로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으나. 1909년에 일본인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고, 1986년에 우리 전통양식에 가깝게 재조성한 것입니다.

 

위쪽의 작은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로, 백련지/백련담 등으로 부른 기록도 있다고 하네요.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했고,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소춘당지)이었죠.

 

면적이 넓었던 아래쪽 춘당지는 11개의 논을 호수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서 모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사용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ㅜㅜ

 

춘당지 한쪽에 있는 하얀 소나무, 백송

어릴 때엔 초록색이 들어간 푸른빛이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차츰 흰 얼룩무늬가 많아지는 소나무라고 합니다.

 

고향은 중국의 베이징 부근이며, 조선시대 사신으로 간 신하들이 귀국할 때 솔방울을 가져와 심은 것이 여기저기 퍼졌습니다.

서울 재동이 백송(헌법재판소 내), 서울 조계사 백송, 고양 송포 백송, 예산 용궁리 백송, 이천 신대리 백송 등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춘당지에는 청둥오리와 원앙이 유유히 즐기고 있네요.

 

오리와 원앙 모습

날씨가 따뜻할 때에는 수많은 원앙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원앙은 원래부터 행복한 부부로 비교하여 얘기하는데, 실제로는 바람둥이라고 하죠.

교미를 하고 나면 다른 데로 가버린다고 합니다.

오히려 부부가 해로하는 건 기러기라고 합니다.

 

이곳은 춘당지 위에 있는 자생식물 학습장입니다.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용, 약용, 관상용 식물 200여종이 심어져 있습니다.

 

관덕정

 

대온실 오른쪽 숲에 있는 정자로 이곳은 원래 누에를 치던 곳이었는데, 1642년(인조 20)에 활쏘기를 위한 사정을 지어 취미정이라 불렀으며, 1664년(현종 5)에 이름이 관덕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관덕정 아래에는 군사들이 활쏘기나 말타기 연습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창경궁에 있는 고양이

 

창경궁 대온실

 

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입니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입니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고,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개방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온실 앞에 있는 동백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건축의 뼈대는 목재와 철재, 외피는 유리로 덮여 있습니다.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온 것과 때를 맞추어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는데, 대온실 역시 일제의 불손한 의도 아래 만들어진 건축물이네요.

 

대온실 앞에 있는 작은 연못인 이곳이 원래 춘당지였다고 합니다.

 

춘당지 앞에 있는 보물 1119호 팔각칠층석탑

 

춘당지를 따라 왼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팔각칠층석탑이 보이는데요.
이 탑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박물관을 만들 때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식 탑으로 중국 명나라(1470년) 때 만들어졌다는 글귀가 탑신에 들어있다고 합니다.

기단은 사각형의 지대석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춘당지에 있는 이 작은 섬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요.

1986년 경주 안압지를 본떠 조성한 것이랍니다.

 

서울에는 조선시대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과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 등이 있는데, 창경궁은 이들 궁궐과는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전엔 두 번 다녀왔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오랜만에 가서 창경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네요.

 

확실히 블로그를 하다 보니 자세히 봐지는 듯합니다. 

블로거의 사명감이랄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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