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역사를 한눈에,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은 종로구 옛 경희궁터에 위치한 시립 박물관으로,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2002년 5월에 개관했습니다.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18만 점 이상의 서울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와 조선의 수도였던 곳으로 한반도 역사의 중심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런 수도 서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역사박물관입니다.
아이와 함께 방문해 전시도 구경하고 체험도 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딸애가 어렸을 땐 자주 찾은 곳이지만 아이가 크니 이런 박물관을 찾을 일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 5년 만에 서울역사박물관에 행사가 있어 찾았는데, 행사까지 시간이 있어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공간을 돌며 구경했습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우리나라의 수도입니다.
서울의 역사가 바로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죠.
옛날의 서울풍경과 지금의 서울, 역사적으로 서울에서 어떤 변화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서울역사박물관입니다.
서울은 백제 건국초기에 우리역사에서 최초의 수도로 등장했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는 서울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곳입니다.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이 개국하면서 다시 서울은 한반도의 수도로 자리잡으며 역사의 중심에 섰습니다.
시대에 따라 서울은 위례성, 한성, 한산, 북한산, 남평양, 한양, 양주, 남경, 경성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고, 서울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수도를 가리키던 '서라벌'이 '셔ᄫᅳᆯ'(예. 용비어천가)을 거쳐 '서울'로 변형된 말로 추정하고 있다네요.
서울은 큰 도시, 새로운 도시라는 의미가 담긴 순우리말입니다.
현대의 서울특별시는 1946년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며 만들어졌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식 수도가 되었습니다.
먼저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역사 전시물부터 구경했습니다.
전차 381호(등록문화재)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까지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했던 전차로 마지막 남은 2대의 전차 중 한 대입니다.
서울에 처음 전차운행을 시작한 것은 1899년 5월 17일부터였으며,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였습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의 주요 교통수단이었으나 버스와 자동차 운행이 증가되면서 방해가 되자 1968년 11월에 전차운행을 중지했습니다.
전차 381호는 10::00~17:00까지 실내관람(월요일은 휴관)할 수 있습니다.
종로 시전행랑 유구
청진동 피맛골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상가점포에 해당하는 시전행랑 유구로 이곳으로 옮겨와 복원시켜 놓은 것입니다.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
콘크리트 광화문은 세종대로를 수도의 상징거리로 조성하기 위해 1968년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축에 맞춰 콘크리트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광화문을 원래 있던 자리로 복원하기 위해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7년 해체했습니다.
이때의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들을 이곳에 옮겨 전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부재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청산과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조선총독부 청사(1926년 완공)는 철거되었고, 이때 장식기둥과 주두의 일부를 이곳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청사로,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1982년까지 중앙청이란 이름으로 정부청사로 사용했고,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가 철거가 되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로, 18만 점 이상의 서울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1층은 기획전시실과 어린이학습실, 기증유물전시관, 뮤지엄샵이 있고,
2층에는 사무실이, 3층에는 상설전시관과 도시모형관이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8:00(30분전 입장마감), 매주 금요일엔 야간개장, 18:00~21:00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정상운영), 1월 1일,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최초 1시간 1,000원, 이후 5분당 400원(1일 주차 22,000원)
(경희궁 입구에 주차장 있음)
서울역사박물관 로비
서울역사박물관은 본관을 중심으로 한양도성박물관, 청계천박물관,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경교장, 백인제가옥, 경희궁,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군기시유적전시실, 돈의문역사관, 딜쿠샤, 서울생활사박물관 등의 분관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측에 서울역사자료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층 기획전시실 앞에 있는 조선시대 어좌 포토존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에는 주얼리산업 100년사와 함께 명장 9인의 작품 14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는 6월 23일까지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야주개홀에서는 서울시 종로구가 주최하고 월곡주얼리산업진흥재단이 주관한 종로주얼리포럼이 열렸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우리나라 주얼리산업 현황을 살펴보고, 위기의 대한민국 주얼리산업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토론하는 행사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구경한 것도 이 행사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네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보스니아 War Childhood Museum 국제교류전으로 전쟁을 겪은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8월 25일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쟁 중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경험을 공감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어른의 책임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내용은 사라예보 포위전(1992-1995)을 경험한 어린이들의 38개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전쟁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누구에게나 끔찍한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현대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을 겪은 어린이들이 1,425일간 세상과 단절된 도시 속에서의 전쟁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일상의 소중함을 담담하게 풀어가는 전시입니다.
3층상설전시실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와 뒤쪽 풍경
3층은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입니다.
상설전시실은 총 5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개항,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고도성장기의 서울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상설전시는 1존 조선시대의 서울, 2존은 개항기와 대한제국기의 서울, 3존은 일제강점기의 서울, 4존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5존은 도시모형영상관 등 5개 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설전시 1존은 '조선시대의 서울, 500년 왕도를 세우다'입니다.
500년 왕도를 세운 조선시대의 서울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조선 건국 후 한양 정도부터 개항 이전까지 조선시대의 서울을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한양의 육조거리와 시전을 중심으로 북촌, 중촌, 남촌, 그리고 성저십리에 걸쳐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한양도성 안의 운종가와 육조거리, 북촌에서 도성 밖 성저십리에 이르는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상설전시실 1존 전시 모습
1394년 한양 땅이 새로운 도읍지로 정해졌죠.
새 수도는 우리의 옛 전통과 풍수지리,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겸비하여 건설되었습니다.
계획도시 한양, 수도 한양의 형성과정
‘좌조우사’의 이념에 맞추어 궁궐과 함께 종묘와 사직을 배치하였고, 한양도성은 백악산을 비롯한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쌓으면서 평지 부분을 연결하여 완성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유물
두 번의 전란과 한양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일찍이 없었던 대전란에 휩싸이면서 전국의 생활 기반 시설은 물론 사회, 경제체제 또한 무너져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입었습니다.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수도 한양의 궁궐과 종묘, 대부분의 관청과 시전행랑 등 도시 기반 시설과 가옥들이 약탈과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죠.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와 광해군 대에 종묘와 창덕궁을 비롯한 도시 시설을 재건하면서 왕도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전후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명청과의 외교문제로 병자호란이 발발했습니다.
병자호란의 전란 기간은 짧았지만 조선의 패배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족과 50만 명에 달하는 양민들이 인질로 잡혀가는 등 그 피해는 매우 컸고, 이 두 번의 전란 이후 조선은 전후 복구를 위해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기존의 국가운영 체제를 재편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4층으로 올라가면 정보의 다리가 있습니다.
학습과 체험공간으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 육조거리 모형
육조거리는 광화문 앞 대로(현 세종대로)를 말하며 의정부와 6조 같은 국가의 중추적인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입니다.
높은 장랑이 양쪽으로 열 지어 있는 너비 60미터의 거리는 왕도중심 거리였고, 왕과 백성이 만나는 소통의 거리였습니다.
한양도성 안 마을
한양의 도시공간은 도성을 기준으로 도성 안과 도성 밖 성저십리로 나뉩니다.
한성부의 행정편제로 도성 안팎지역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의 5부를 두었고, 5부와는 별도로 도성 안에 북촌, 남촌, 서촌, 남촌, 중촌, 아랫대 지역으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백악산 아래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를 북존, 남산 북쪽 기슭 아래를 남촌, 광통교에서 종묘 앞 호경교에 이르는 곳은 중촌, 경복궁 서쪽의 개천 상류지역을 서촌(웃대), 효경교에서 오간수문에 이르는 개천 하류지역을 아랫대, 낙산 서쪽 기슭을 동촌이라 했습니다.
이들 지역은 자연경관과 입지조건, 거주자들의 신분적 특성에 따라 각각 지역문화 양상이 달랐습니다.
육의전 시전상인과 난전상인, 책사와 서화사 모습
시전상인은 특권상인으로 국가와 왕실에 국역의 의무를 지는 대가로 독점적 영업권인 금난전권을 보장받아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한양이 상업도시로 발전하면서 난전상인들이 성장했고 이들이 금난전권 폐지 요구로 1791년(정보 15)에 금난정권이 폐지되었습니다.
광통교를 중심으로 개천 주변에는 책사, 서화사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했습니다.
책사에서는 방각본(민간에서 복판으로 간행해 판매하는 책자) 유통이 활발하면서 무교동, 미동 등 일대에는 판매를 목적으로 책을 찍는 출판업이 성황을 이뤘습니다.
또한 서화사에서는 그림을 애호하던 풍조를 반영했으니 산수도 같은 그림이나 입춘에 쓰이던 액막이용 세화가 주로 거래되었습니다.
운종가 시전 모형
개천의 춘천
백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인 개천(오늘날의 청계천)은 큰비가 내리면 흘러내린 흙이 쌓여 범람하곤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무분별한 벌목으로 심해졌다고 하는데요.
1760년에 대대적인 춘천사업으로 하천을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경강상인의 활동과 상품유통의 중심지, 마포
경강은 전국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심지로 물류의 중심이자 국가 조세곡 운송의 종착지였습니다.
경강은 도성 안의 미곡, 목재, 아물, 소금을 공급하는 도매시장이었고, 전국의 상품가격을 결정하는 중앙시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강을 통해 운행했던 황포돛배
도성 밖 성저십리의 범위는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 속합니다.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고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는 한양 사람들이 소비하는 채소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한양으로 가는 10대로
의주1대로, 경흥2대로, 평해3대로, 동래4대로, 봉화5대로, 강화6대로, 수원별로7대로, 해남8대로, 충청수영9대로, 통영별로10대로
상설전시 2존은 '개항, 대한제국기의 서울'입니다.
서울에 불기 시작한 변화의 새바람이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전시되고 있는데요.
자주적 개혁에 대한 노력과 식민지화를 위한 압력이 엇갈리는 가운데 일상생활에 파고든 새로운 문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서울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경복궁 중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군함이 나타나며 제국주의 열강의 서울침투의 신호를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은 전통과 서양의 근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모든 면에서 격변하는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1897년에는 대한제국이 되었습니다.
근대화 시기의 서울의 모습
1876년 조선과 일본의 수호조규 체결 이후 조선 내부에서는 신문물 도입과 관련해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으나 정부가 반대세력을 억누르면서 열강과의 통상관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때 정동에는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들어섰고,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양관을 신축했습니다.
정동교회, 성공회성당 등 종교시설이 들어섰고 선교와 의료, 교육기관도 들어섰습니다.
외국인들이 늘면서 호텔과 상점들도 들어서면서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무대가 되었습니다.
이후 1896년 종로일대에 있던 가건물을 철거하고 원각서 터에는 근대식공원인 탑골공원을 조성했고, 전차 선로를 건설했습니다.
종로에 신물물 건축물들이 늘어나면서 개화의 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상설전시 3존에서는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서울'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1910년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 암울 했던 식민도시 경성을 돌아보는 공간인데요.
일제에 저항하면서도 근대문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서울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시기의 종로거리 모습을 디지털 아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자국 영토에 편입시켜 영구히 지배하는 한편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구상은 서울 공간에 표현되었는데요.
도로 체계는 일본의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였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대 국권을 상징하던 건축물은 대부분 파괴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고 가까이에 대규모 공공건물들이 새로 들어섰습니다.
도시 행정과 도시 관리는 언제나 일본인의 편익을 우선하였습니다.
총독부는 중일전쟁 직전인 1936년에 경성부의 영역을 확대하여 전쟁 물자 생산시설들을 배치하였고, 한국인들도 식민 통치에 적응하면서 도시 공간 곳곳을 변화시켰습니다.
근대화시기의 역사연표
1920년대 경성 모습
항일민족운동의 상징, 경성
3.1 만세운동의 시작, 의열단원의 의거를 단행한 곳, 종로 YMCA와 낙원동 천도교대교당에서의 민족의식 고취와 신지식 전파 등 항일운동의 상징이었던 곳이 경성이었습니다.
근대도시 경성의 거리 - 광화문통~태평통
1920~30년대의 경성은 근대화 도시계획의 가시적인 성과로 인해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성의 중심가인 광화문통-태평통, 남대문통, 본정통, 종로를 중심으로 서양식 근대건축 관공서들이 들어서고, 전차 노선이 곳곳에 확대 부설되면서 새로운 근대 도시경관을 만들어냈습니다.
‘한국인들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이었고, 상대적으로 큰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인력거
근대도시 경성 모습, 한양방과 이발소
평화카페와 한양구락부
빨래터
경성을 덮은 전쟁의 그늘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을 개시한 일본은 1941년 전선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하하자 경성은 전쟁의 그늘이 짙어갔습니다.
모든 생산 요소가 군수 산업에 집중되어 소비재 산업은 극도로 위축되었고, 배급 물자는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경성부민들은 극도의 곤궁 속에서도 강제 저축과 공출로 재산을 약탈당하였고, 방공 훈련과 사상 교육, 노력 동원으로 신체를 억압당하며 굶주린 주민들이 언제 전선에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거대한 수용소였습니다.
상설전시 4존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입니다.
해방 이후 서울의 비약적인 성장과 변화를 돌아보는 공간으로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이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발전하기까지 도시 변화상과 서울사람들의 생활상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8.15 해방, 대군정과 정부수립
한반도는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남한에는 미군정이 시행되었습니다.
서울은 1946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고, 좌우익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으로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운 나머지 결국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정부 수립 2년 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다시 일어서는 서울, 여의도 모래펄에서 서울의 맨해튼으로, 한강개발
1953년 100만 명 정도였던 서울의 인구는 1963년 300만 명을, 1970년 500만 명을 돌파하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 아래 ‘불도저’ 김현옥 시장이 등장하면서 서울의 도시경관은 급격히 변모했습니다.
당시 개발의 상징, 돌격건설
1970년대 강남 개발, 가자! 강남으로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었으나 아직 한적한 시골로 남아 있던 한강 이남 영등포 동쪽의 ‘영동’ 지역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강남’이라는 지역명으로 새롭게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광활한 강남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강북의 명문학교들을 강남으로 대거 이전시키는 등 강북 개발을 억제하고 강남에 특혜를 주는 다양한 유인책들이 시행되었습니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제3한강교인 한단대교가 건설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중상류층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단지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었고, 편리함과 안락함을 두루 갖춘 아파트는 점차 서울 시민의 대표적인 주거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패션타운의 원조인 평화시장과 봉제공장
도시제조업의 메카, 세운상가
1970년대 광고
1978년 입주한 서초삼호아파트 9동 000호
1970년대의 전형적인 아파트 내부 모습을 전시하고 있는데요.
당시 4인 가족이 1981년부터 30여년 동안 거주한 공간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서초삼호아파트는 지난 2014년 철거되고 재건축되었습니다.
부엌 베란다, 주방, 안방
아이들 체험공간
서울의 거대 도시화
서울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지 채 반세기도 되지 않아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성장했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한 관 주도적 캠페인 하에 ‘86·88의 시대’를 거치면서 강남·북을 아우르는 ‘국제도시’로 거듭난 서울은 총 25개 자치구에 약 천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도시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에서 새천년으로, 밀레니엄 서울
1990년대 이후 초거대도시화된 서울은 도시 사회문화 전반에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민주화의 결과로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시장 선출방식이 민선으로 바뀌는 한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충격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수도권 1기 신도시 건설로 서울의 생활권이 광역화되면서 교통난 해소 등 도시인프라 확충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고, 이는 2004년 대중교통체계 개편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도심의 뒷골목, 청일집 재현공간
상설전시 5존은 도시모형영상관입니다.
'도시모형영상관'은 정교한 모형과 IT 기술을 결합한 멀티미디어 전시관입니다.
'서울,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주제로 317.29㎡ 넓이의 전시관에는 605.25㎢ 규모의 서울을 1/1500으로 축소한 가로 21.5m× 세로 14.5m의 대형모형을 설치하여 서울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젖줄, 한강
양화대교와 선유도공원 그리고 그 아래 우리집도 찾았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오랜만에 찾았더니 모든 전시물이 새록새록하네요.
볼거리가 많고, 서울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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