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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식같은 여행으로의 초대 ♪♩♬~
경기도 남부 여행

병자호란의 기억, 남한산성역사문화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5.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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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지난 주말에 남한산성을 다녀왔습니다.

벚꽃이 한창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4월 중순에 눈까지 내리던 날씨를 보였던 날입니다.

 

벚꽃이 한창일 때라 평상시 같으면 나들이객이 너무 많아 휴일에 올 생각을 못했지만, 날씨가 너무 변덕스러워 비교적 한산한 가운데 남한산성 주변 볼거리와 먹거리를 탐방했습니다.

 

남한산성 남문이 있는 산성터널을 들어서면 남한산성도립공원 남문주차장 앞에 새로 생긴 남한산성 역사문화관이 있어 들렀습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아픈 기억이 있는 역사적인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요.

남한산성의 역사와 자연, 문화예술을 전시하는 역사박물관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개관한 곳입니다.

 

남한산성역사박물관 모습

우리나라 11번째 세계유산인 남한산성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전시, 교육하는 공간으로 작년 10월 말에 오픈한 곳입니다.

 

남한산성 역사문화관은

지하 1층에 보이는 수장고,

1층에는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다목적홀, 강당 등이 있고,

2층은 하늘정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역사박물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10:00~18:00(입장마감 17:30)

휴관일(휴무일) 매주 월요일(공휴일 제외), 1월 1일, 설과 추석 당일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남문주차장 이용(평일 3,000원, 주말/공휴일 5,000원)

 

남한산성 남문주차장 모습

벚꽃 피는 휴일이라 평상시 같으면 주차할 수 없을 정도로 북적일 텐데, 변덕스러운 날씨로 주차장과 남한산성 도립공원 전체가 한가한 편이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곳곳에 주차장이 있는데요.

이곳 남문주차장을 비롯해 옆에 남한산성 로터리주차장, 중앙주차장, 세계유산센터주차장, 동문주차장(여긴 무료) 등이 있습니다.

 

주차요금은 1회 주차 시 평일 3,000원, 주말 5,000원인데요.

경차와 2자녀 등은 50% 할인되고, 유공자, 장애인, 3자녀 등은 무료주차가 가능한데, 여기에 친환경자동차도 무료주차가 되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제 차는 하이브리드라 무료로 주차할 수 있었네요.

 

1층의 제일 먼저 만나는 전시실은 기획전시실

'병자호란의 기억'

 

병자호란 당시의 47일간의 항전을 다루고 있는데요.

조선시대의 다양한 무기류들을 통해 화포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심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입니다.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산새를 따라 구축되오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였던 것입니다.

 

성 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과 풍부한 수자원을 갖추고 있어 수만 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라시대 건물터와 무게 20kg에 달하는 거대한 기와가 발견되면서 주장성이 있었던 자리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이때가 통일신라 문무왕 12년(672년)입니다.

 

숫자로 보는 병자호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45,000여명이 있었다고 하며, 서북방 경계에 지방군과 근왕병 43,000여명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청나라는 13만여 명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정규군 22,000명, 몽골병력 등을 합쳐 34,000여 명이라고 합니다.

 

후금은 날로 세력을 키우며 조선이 사대하던 명나라를 위협할 지경까지 세력을 확대했는데요.

 

 

병자호란 개괄적인 줄거리

 

병자호란 이전에 정묘호란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요.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갈등이 격화되자 중립외교를 펼치며, 1621년 수도 방어를 위해 새로운 산성 축성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중립외교는 친명배금 정책으로 외교노선이 정 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1626년 완공했고,  남한산성에 수어청, 어영청을 설치하며 군사력 증강에 힘쓰긴 했습니다.

 

후금은 조선의 바뀐 외교정책과 후금과의 수교를 거절하자, 1627년 조선을 침입해  정묘호란을 일으켰습니다.

후금은 파죽지세로 보름 만에 황해도와 평안도를 장악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을 갔으나 결국 형제의 화약을 맺고 전쟁은 종료되었습니다.

 

당시 후금은 면과의 전쟁이 중요한 나머지 조선과의 관계는 중요치 않게 여기며 빨리 끝나길 원했고, 조선의 편의를 봐주며 화약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숭명배금의 명분을 중요시했던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후금에 소홀히 대했고, 후금은 10년도 채 되지 않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칭제건원에 동참할 것을 조선에 건의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같은 해 12월 1일, 12만 군사를 이끌고 청 태종 홍타이지가 쳐들어 왔던 사건이 병자호란입니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의 턱밑인 개성까지는 단 14일 만에 도착했고, 이에 한양에서는 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는데요.

인조는 둘째 봉림대군, 셋째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피란을 보내고, 본인도 첫째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가려고 했으나 청이 길을 막았다는 소식에 남한산성으로 피란을 하게 되었습니다.

 

15일에 강화도로 가기 위해 다시 나섰으나 눈보라가 심해 결국 포기, 16일에 청군이 도착하여 대치를 시작했습니다.

추운 날씨와 배고픔으로 근근이 버텨가던 중 믿었던 강화도까지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청 황제에 대치한 지 47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청 태종은 한강 동편의 나루터(현재의 석촌호수 송파나루공원)인 삼전도에 9층의 단을 만들어 앉고 인조에게  삼배구고두레(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림)를 시행케 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삼전도의 굴욕)

 

이후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의 조약을 체결하며 펑청의 신하가 되었고, 청일전쟁에서 패한 1895년까지 무려 25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을 볼모로 잡아갔고, 조선인 여자 50만 명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당시 심양 시장에서 팔린 조선인만 해도 66만여 명이나 됐다고 합니다.

 

이후 청으로부터 근 10년여 만에 풀려난 소현세자는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며 백성들의 신임을 얻자 이를 시기하던 인조의 의해 독살을 당했다는 루머가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세자빈과 두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고, 셋째인 경안군만이 강화도와 황해도 등에 흩어져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조선군과 청나라군의 병력 및 편제

 

수도방어군과 각지 근왕병까지 90,000여 명이었던 조선군에 비해 청나라군은 약 34,000여 명.

숫자로 보면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추위와 굶주림에는 병력의 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88만호에 이르던 가구는 44만호로 절반이나 줄어들었고, 인구도 416만명에서 152만명으로 줄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지 알 것 같네요.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를 섬기며 양 국가에 조공물품을 보내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청나라 홍타이지의 조선침략

 

1618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 군이 푸순성을 함락시키며 명나라와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광해군은 후금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립외교를 펼쳤으나 사대부의 반발이 컸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자 누르하치에 이어 왕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지나간 역사에서 광해군은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명나라의 반대, 아버지인 인조의 변심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죠.

아버지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패륜을 저지르며 왕권에서 쫓겨나고 말았죠.

 

하지만, 인조의 배금 정책으로 두 호란을 맞아 엄청난 피해를 당한 것을 보면 광해군이 패륜을 저지르지 않고 왕권을 유지했다면 어떤 모습으로 조선의 역사가 흘러 왔을지 상상해 봅니다.

 

조선시대의 삼수병

 

원래 초기 훈련도감에서는 총을 쏘는 포수와 창칼을 쓰는 살수로만 병과로 구경했는데요.

그러다가 활을 쏘는 사수부대가 편입되면서 삼수병 체제가 완성됐습니다.

 

척화와 주화

 

1636년 12월 14일, 청군의 추격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전국 각지에 군대에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근왕병들의 분전에도 산성을 둘러싼 청군의 포위망은 점점 더 좁혀왔습니다.

 

이때 청나라와 강화하자는 주화론,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는 척화론이 대립했던 것입니다. 

당시 척화론과 주화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신하는 각각 김상헌과 최명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삼수병이 쓰던 무기들

 

기획전시실 옆에는 상설전시실이 있습니다

'인류의 공동유산, 남한산성'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반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고 적의 접근이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로써 단 한 번도 전투 중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라고 합니다.

또한 내부 면적이 넓어 각종 시설이 들어서게 되는데, 특히 남한산성 행궁은 조선시대 20여 개의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까지 갖춘 시설이 들어설 정도였으니까요.

 

남한산성은 임진왜란 때 강력한 조총과 화포의 위력을 실감한 이후, 화포를 이용한 전쟁에 대비를 하여 쌓은 성으로써 여장과 포루 등에서 이전의 성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조 때 대대적인 수축 이후 조선 후기까지 지속해서 정비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인조, 숙종, 영조, 정조 때의 다양한 축성기법의 표본이 잘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인류의 공동유산, 남한산성

2014년 한국의 11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고, 조선의 자주, 독립의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라는 점이 인정받았습니다.

 

 1925년 대홍수에 의해 유실된 동문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과 장대, 대문, 승영사찰터 등이 온전히 남아있고, 가능한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남한산성 모습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한 것인데요.

당시 후금과 명나라의 갈등이 격화되자 광해군이 남한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축성을 시작한 이후 인조대에 완공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의 규모는 전체 둘레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이며 높이는 7.3m입니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정문(동문(좌익문), 서문(우익문), 남문(자화문), 북문(전승문)이 있고, 암문이 16곳, 포루 7곳 등이 있습니다.

돌로 쌓은 산성이며 여장은 처음엔 벽돌이었다가 기와로 바뀌었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였습니다.


또한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행궁지 출토 초대형기와

길이가 64cm 내외로 670년대 전후의 기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역사

 

현재는 성벽과 여장, 행궁지, 동서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남아있습니다.

 

고지도 속 남한산성

 

동문에서 북문까지, 행궁과 수어장대, 숭렬전, 지수당, 인화관, 승보사찰 등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의 흔적을 따라 걷다

 

조선의 화포와 남한산성 포루

 

산성마을 사람들

 

남한산성은 도립공원이면서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성 안에 산성마을이 있습니다.

 

숙종 때 4,000여명의 주민이 살았었고, 농업과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도립공원, 남한산성 전통공원 풍경(인화관, 침괘정)

 

남한산성 승영사찰들

나라를 지키고 국가를 안위하는 사찰들입니다.

 

남한산성 축성을 위해 기존의 망월사와 옥정사 외에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장경사, 천주사, 동림사, 동단사, 남단사 등 8개의 절이 창건되었다고 하며, 이들 사찰을 남한산성 승영사찰이라고 합니다.

 

승영사찰은 단순한 절이 아닌 국가 방어체계의 일부로 군사적 사찰을 말하는데요.

 산성 축성에 동원된 8도 승군의 주석처이자 승군이 군기와 화약을 비축하고서 산성을 수비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장경사 만이 오롯이 남아있고, 망월사, 개원사는 일부 건물들을 복원하여 현재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청사, 한흥사는 그 터가 발굴조사된 바 있으며, 나머지 사찰들은 모두 폐사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승영사찰, 청경산 망월사

남한산성 승영사찰, 남한산 장경사

 

세계유산 등재과정과 노력

 

남한산성의 사계를 미디어파사드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맞아하는 봄, 적시는 여름, 물드는 가을, 고요한 겨울

 

역사문화의 공간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 운영,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하 1층에는 보이는 수장고가 있습니다.

요즘 짓는 박물관에는 수장고도 보여주는 전시실로 꾸미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역사문화관의 보이는 수장고에서는 ‘산성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신라와 조선의 기와를 미라클글라스(영상스크린으로도 이용이 가능한 접합유리) 영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영상에서는 남한산성 행궁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초대형 기와 소개와 함께 그 기와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데요.

무려 1,400년간 보존 돼온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재입니다.

 

천 년의 세월을 견뎌 온 기와

 

2층에 오르면 하늘정원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축성을 직접 접할 수 있고, 남한산성 도립공원 일대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남한산성 역사문화관 옆에 있는 산성마을

이곳엔 남한산성의 유명 음식인 백숙 등을 파는 식당과 한의원, 만해기념관 등이 있습니다.

 

4월 중순인데 눈 내리는 순간을 잡았습니다.ㅎ

 

남한산성에 와서 조선시대 극도의 혼란기였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남한산성 역사문화관 투어였습니다.

 

남한산성은 벚꽃 개화가 무척 늦다고 하며, 그만큼 겨울이 길다는 뜻이기도 하죠.

병자호란 당시의 한겨울 남한산성의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버티던 47일간의 모습을 잠깐 그려봅니다.

 

남한산성 벚꽃길엔 벚꽃이 만개했지만, 남한산성 내의 벚꽃은 막 개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근교 벚꽃 드라이브 코스, 남한산성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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