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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서울 천주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by 휴식같은 친구 2019.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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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주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집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있는 서울 천주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정확한 명칭은 절두산성지순교기념관.

무심코 저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지나치기만 했는데 어느 날 문득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들렀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보니 성지라고만 보여서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는데 가보니 의외로 성지에 대한 견해도 넓히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더라고요.

 

서울 숨어있는 관광지라고 말해야 하나, 천주교 성지라서 관광지라고 언급하기에 조금 부담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절두산 순교성지를 둘러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당산철교 북단, 강변북로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작은 산 위에 십자가가 있는 건물이죠.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 절두산 순교기념지 표지를 보고 10분 정도 도보로 이동하면 됩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주차장은 별도로 있으니까 차를 가져가면 주차하면 되고요.

아래 망원 한강공원 망원 1주차장에 주차를 하면 바로 위가 절두산 순교성지이기도 합니다.

 

망원한강공원 주차장 주차비는 30분에 1,000원, 추가 10분당 200원입니다.

 

 

절두산은 본래 북악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세가 한강에 가로막혀 불뚝 솟아오른 모습이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든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잠두봉이라 불린 산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도가 참수형으로 죽은 곳이라 하여 절두산이라 불려 왔다고 합니다.

 

1956년 잠두봉 일각을 매입한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잠두봉을 절두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아래 강변북로 아래쪽 한강 풍경입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주차장 쪽에 있는 절두산 순교자기념탑 모습입니다.

(2001, 이춘만 작)

 

순교자는 8천여 명이지만 기록상 남은 순교자는 무명인 5명을 포함해 고작 29명이라고 합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에는 이들 29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고 주차장 옆에는 꾸르실료회관이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육관입니다.

 

꾸르실료(Cursillo)는 스페인어로  과정, 코스(Course)를 말하는 Curso와 short라는 의미의 접미사 -illo의 합성어로 단기과정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꾸르실료회관 앞에는 동상들이 몇 개 세워져 있습니다.

 

이승훈 베드로(1756~1801) 동상

 

 

 

이승훈은 1784년 2월 북경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및 십자고상, 상본 등 많은 성물을 국내에 들여와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과 신자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강변의 성모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마지막으로 서 있던 절두산을 바라보고 있네요.

 

1866년 병인박해 때 무려 8,000여 명이 참수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처형이 이루어진 곳은 절두산 보다는 양화나루터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병인박해 시 수많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스며들어 있는 땅, 양화나루터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꾸르실료 회관이 있습니다.

 

가톨릭 순교성지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가톡릭 순교성지라는 표지석이 그 옛날 순교자들의 억울함을 간직하고 있는 듯합니다.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 10월에 침범합니다.

 

 

조선정부는 교전 후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주로 처형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범 책임을 묻기 위한 것과 일부러 보여주기 식이라 합니다.

 

수천이 목숨을 잃었지만 기록된 확인자 수는 고작 29명(무명 5명 포함) 뿐이라고.

 

한국순교성인시성기념교육관

 

서울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사적 39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형 풍광이 아름답고 한양 도성과 가까워 사대부와 문인이 많이 찾았다고 전해지는데요.

 

양화나루 너머 노을지는 모습을 양진낙조라 불리던 마포팔경 중 하나입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일행이 강화도에 침범하는 사건이 발단이 되면서 양화나루는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도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요.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이곳을 오랑캐에 의해 더럽혀졌다며 천주교 신자의 피로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고 했었다네요.

 

한국순교성인시성기념교육관 1층 모습

 

절두산순교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성지가 잘 단장되어 있네요.

 

천주교는 우리나라에 학문으로 시작된 종교란 사실을 아시나요?

서양 학문으로 조선에 전해져 그 서양학문을 공부하던 학자와 양반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정원에 있는 항아리모습

 

아시아 최초 교황청 승인 국제 순례길로 승인된 곳인데, 절두산순교성지는 3코스 일치의 길에 있네요.

 

24곳의 순례지를 3개 코스로 잇고 있습니다.

1코스(말씀의길)  명동성당-장악원터-이벽의집터-좌포도청터-종로성당-광화문-가톨릭대 성심교정-석정보름우물-가회동성당

 

 

2코스(생명의길)  가회동성당-광화문시복터-형조터-의금부터-전옥서터-우포도청터-경기감영터-서소문역사공원-약현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성당, 서소문 순교성지인 중림동 약현성당

서소문순교성지에 들어선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과 서소문역사공원

 

3코스(일치의길)  약현성당-당고개순교성지-새남터순교성지-절두산순교성지-노고산성지-용산성심신학교-왜고개성지-삼성산성지

 

성녀 마더 테레사 흉상

 

마더 테레사는 가톨릭 수녀로 1928년 수녀회에 들어가 평생을 인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죠. 

1948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여 전 세계적으로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시복되어 '콜카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20년 폴란드 태생으로 1946년 사제수품, 1967년 추기경 서임(바오로 6세교황), 1978년 재264대 교황으로 피선, 2005년 선종했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에 들어서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를 통해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임명되었습니다. 

 

조선에 돌아와 전교 활동과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던 그는 기해박해 때 순교당했습니다. 

그의 열성적 전교 활동과 경건하고 당당한 신앙자세는 이후 천주교인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진후는 50세 때 교인이던 아들의 권유로 입교한 후 1791년의 박해 이래 수차례 검거되어 고문·귀양 등의 고난을 겪다가 1814년 충청남도 해미 옥중에서 순교했고,  이에 할아버지 택현은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으며, 김대건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준은 다시 내포로 이사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한양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산책길은 십자가의 길이라고 명명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시작 지점 모습이네요.

 

삽자가의 길에 세워진 조각상들

 

안쪽으로 들어가니 박순집의 묘와 성 남종삼의 흉상이 있고, 여러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견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박순집

그의 일가족 16위 순교자 공적비도 있습니다.

 

남상교(아우구스티노)의 청덕거사비

남상교는 성인 남종덕의 백부이자 양부로 현풍 현감으로 재직 시 어려울 때 백성들에게 성정을 베풀어 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병인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50세에 서소문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흉상과 순교사적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지품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비가 세워졌고,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송마리아의 묘비

신유박해 때 대역죄인으로 몰료 사사되었다가 철종 2년에 사면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운당대사 의징지비

 

성 남종삼(요한, 1817~1866)의 흉상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상

 

그리고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비가 있습니다.

 

역사시간에 많이 들었는데 실물 영접은 처음이네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라고 적혀 있다 합니다.

 

척화비 뒤로 보이는 한강과 국회의사당 모습

 

성모동굴 성모상과 봉헌초 모습

 

위로 올라가면 절두산 성당과 절두산 순교박물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확인해 주세요.

 

서울 천주교 순교성지, 절두산 성당과 절두산 순교박물관

박물관 지하에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년 특별전도 열리고 있습니다.

 

천주교도들에겐 정말 의미있는 성지가 아닐 수가 없는 곳인데요.

 

가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아닌 개방정책을 취했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일지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랬더라면 천주교도의 수많은 순교자도 없었을 것이며,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며, 남과 북으로 갈라지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

 

세월이 지난 지금이야 이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없는 일이지만 아쉬운 마음에 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 있는 천주교 성지, 교황청이 인정하는 순례길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천주교 박해를 이해하고 이 땅에 천주교가 어떻게 정착되었는지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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