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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여행

[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의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발원지)

by 휴식같은 친구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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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전봉준의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발원지)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입니다.

동학농민혁명 발원지가 고창군 공음면에 있습니다.

 

공음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어 무장현관아와 읍성을 지나 전봉준 생가를 거쳐 진격했다고 합니다.

 

예전부터 지나갈 때 표지판을 보고 어떤 곳인가 궁금하기만 했는데, 이번에 지나가면서 잠시 둘러봤는데요.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발원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 있는 선운대로의 구암교

동학의 횃불 모형으로 꾸며 놓아 이곳이 동학농민운동과 관련이 있구나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발원지는 작은 공원형태로 되어 있어 입장료나 관람시간 상관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발원지 표지석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으로 3월 고부 봉기와 9월 전주, 광주 궐기로 나누어집니다.

1차 봉기는 반봉건 운동이고, 2차 봉기는 반외세 운동이라고 합니다.

 

 

동학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고,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며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 사상을 주장하며 교세가 확산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며 1864년에 최제우를 처형하고 탄압이 계속되었습니다.

 

 

1. 고부민란(고부봉기)

 

이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욕심많고 포악)에 분노하여 1894년 1월 전봉준이 전라도와 충청도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을 일으켰습니다.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대해 조병갑의 황포를 시정하고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요구를 하였고, 정부에서 시정하겠다는 답변을 받은 후 10일 만에 해산했습니다.

 

2. 1차 봉기(반봉건운동)

 

하지만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탄압하자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의 원인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고부민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전봉준은 무장지역 손화중, 김개남과 손 잡고 다시 4천 여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21일 최시형 탄생일을 맞아 고부 백산에서 봉기하였습니다.

이른바 1차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했으나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쓸고,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즈음 조선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고, 위급을 인지한 전봉준은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을 맺고 관군과 농민군은 철군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텐진조약에 따른 청나라 개입을 빌미로 5월 6일 일본 군대를 파견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동학농민군 훈련장 터

 

3. 2차 봉기(반외세운동)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1차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강화했고 6월 21일에는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23일 청·일전쟁을 일으킨 후, 25일 1차 갑오개혁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하여 서울로 향했고, 반일감정이 쌓여있던 충청, 경상,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까지 요청하여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으며, 다음날 김개남 부대도 청주 공격에 실패했습니다.

 

당시 전봉준은 관군에게 일본군을 함께 물리치자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이때 전봉준은 체포되어 1895년 1월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성지화사업과 국가문화재 지정을 위해 동학농민운공 기포지 조형물은 구 신왕초등학교로 이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포지 조형물은 이곳에 없네요.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

고창무장 동학혁명 기포지에서 출발하여 무장현 관아와 무장읍성을 지나 전봉준 생가를 거쳐 고부관아로 진격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지

갑오년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지점입니다.

 

고창군 예향 천리 마실길 코스 중 9코스와 10코스가 동학농민운동 발원지와 근처를 지나고 있습니다.

 

갑오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했던 사람의 묘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 동학농민운동의 수장이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전봉준(1855~1895)은 천안 전씨로 이름이 철로이며 봉준은 아명이라고 합니다.

체구가 왜소했으나 야무져 녹두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엔 녹두장군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전봉준은 고창읍 죽림리 당촌리에서 출생하여 13세까지 살았고, 전주와 정읍, 이평면 등으로 이사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아 죽게 되는데 전봉준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훈련장 터 모습

전봉준은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의 전답을 가꾸며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했습니다.

1890년(고종 27)에 동학에 입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 동학접주로 임명됩니다.

 

동학은 경천수심의 도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어 보국안민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농민봉기의 원인은 고부군수 조병갑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조병갑은 당시 영의정 조두순의 서질(형제의 조카)로 탐학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음으로써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고 합니다.

 

1893년에 전봉준을 대표로 삼아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쫓겨났고, 1894년 1월에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게 된 것입니다.

 

소나무 3그루

 

공음면 구수마을은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 무장 창의포고문을 선포한 곳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지역 민란에서 벗어나 전국적 봉기로 출발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이 소나무 세 그루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대장 전봉준(중), 총관령 김개남(좌), 총관령 손화중(우) 등 3명의 지도자를 상징하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전인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당산나무

1894년 4월 25일(음 3월 20일) 무장기포가 일어난 공음면 구수마을의 당산나무입니다.

무장기포 116주년을 맞아 고창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이사자와 전봉준과 손화중, 이개남 장군 등 3대 장군의 후손과 유족 등이 참여해 기념식을 갖고 기념식수를 했다고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안으로는 갑오개혁, 밖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3.1 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근대화시대의 농민운동이라는 식견만 있었는데, 이번에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를 발견하면서 전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 시대의 정치인들도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정치를 해야 이런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학농민운동과 전봉준에 대한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 및 인물정보에서 참고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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