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휴식같은 여행으로의 초대 ♪♩♬~
경기도 북부.인천시 여행

인천 부평 역사탐방, 부평도호부 관아

by 휴식같은 친구 2022. 8. 6.
반응형

인천 부평 역사탐방, 부평도호부 관아 

 

 

인천 계양산에 오르기 위해 계산동에 들렀다가 안내 표지판에 부평도호부 관아라고 적혀 있어서 잠시 둘러봤습니다.

 

계양산 둘레길 한 바퀴 그리고 계양산 전망대 풍경

 

도호부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지방을 관할하기 위한 일반 행정기구로 지금의 군 단위 지역(꼭 그렇지는 않지만)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아울러 부평은 현재 인천광역시와 부천지역의 옛 지명입니다.

 

따라서 부평도호부 관아조선 후기 인천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인천과 부천지역을 관할하던 곳이었습니다.

근래까지도 동헌·객사·근민당, 내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이곳에 부평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은 헐어버리고 현존 건물만 학교 운동장 한 모퉁이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한때는 인천과 부천지역을 호령했을 것으로 보이는 부평도호부 관아 풍경을 담았습니다.

 

계산삼거리에서 부평도호부 관아 방향으로 이동하니 계산 1호공원이 보입니다.

 

부평초등학교 교문과 붙어있는 부평도호부 관아 입구

현재 교육청 소유 대지로  인천광역시 교육청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부평도호부 관아 관람안내

 

관람시간 11~2월 10:00~18:00, 3~10월 10:00~19:00

휴무일(휴관일) 연중무휴

입장료 무료

주차장 없음, 인근 유료주차장 이용

 

부평도호부 관아 모습

예전의 화려했을 넓은 부지의 관아는 온데간데없고 이렇게 한쪽에 좁은 공간으로 만 그 터만 조그맣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도호부는 본래 중국에서 새로 정복한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해 변경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의 행정기구였습니다.

고려시대에 이 도호부가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었으나 점차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되었죠.

 

고려시대 918년(태조 1)에 평양대도호부를 둔 적이 있으나 곧 서경으로 승격하면서 사라졌고,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에도 그 도읍지인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두었다가 940년에 폐지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도호부가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다가 995년(성종 14)에 안동, 안서, 안남, 안북, 안변의 5도호부 체제를 완성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각 도의 단부관을 도호부로 고치고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으며, 태종 15년에는 군 가운데 1000호 이상인 것은 도호부로 승격시키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군현제는 태종 때 크게 정비되었는데 주.부.군.현에 수령이 파견된 읍의 수가 330여개에 달했습니다.

도호부는 후기로 갈수록 증가해 세종 초에 28읍이었던 것이 중종 때에는 45읍, 고종 때에는 75개읍으로 증가되었으며, 1894년에 군으로 통합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부평부사 선정비들

 

이 비석들은 인조 6년(1628) ~ 고종 22년(1885)의 역대 부평부사 중 선정을 베푼 부사들의 선정비들입니다.

예전에는 계산동 도로변 비석거리에 세워져 있던 것들이라고 합니다.

 

부평도호부 관아는 조선시대 부평도호부 관아 건물이 잇던 곳입니다.

1413년부터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경기도 부천시, 서울시 구로구 일부지역을 관할했고, 1895년 갑오개혁으로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된 이후 인천부에 편입되었습니다.

 

부평도호부 관아 안내

현재 이곳에 잇는 것이라곤 관아 한 건물과 욕은지, 어사대, 부평부사 선정비가 모두입니다.

 

 

부평도호부 관아 건물들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숙종 3년(1677)에 중수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동헌(업무처리하는 중심건물), 객사(사신이나 벼슬아치 대접하던 숙소), 내아(지방 관아의 안채), 아사, 연무정, 군기고, 창고, 향청, 화약고 등 232칸의 건물 등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규모였으나 1909년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 헐어졌고, 여기의 관아 건물만 학교 모퉁이로 옮겨졌습니다.

 

부평도호부 관아 옆은 부평초등학교입니다.

수령이 제법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가 인상적입니다.

 

부평도호부 관아 욕은지

 

욕은지는 돌로 쌓아 만든 연못으로 가로 18m, 세로 16m이며, 가운데에 5m가량의 돌산이 조성되어 있고 돌산까지 돌다리가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고, 원래 지금보다 약간 동쪽에 있던 것을 고종 24년(1887)에 옮겨 보수하였습니다.

 

이곳의 욕은지는 22대왕 정조가 정조 21년(1797) 부평도호부를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라 하고요.

당시 정조는 김포 장릉에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하여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 현륭원에 행차했다고 합니다.

 

어사대

 

어사대는 정조 임금이 부평도호부 관아를 방문해서 활을 쏜 곳이라는 표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욕은지 동쪽 축대에 있었던 것이라고 하네요.

 

부평도호부 관아의 유일한 건물

 

이 건물은 내아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원래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1968년 현재 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一자형으로 개조했다고 합니다.

 

내아 건물에서 바라본 욕은지

 

예전에는 부평초등학교 정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었으나 최근 정비를 통해 별도의 대문을 달았다고 합니다.

 

내아 건물은 전시실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문이 닫혀 있어 구경은 하지 못했습니다.

부평도호부에 관한 이야기와 정조의 이야기가 전시되고 있나 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