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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북촌한옥마을] 원서동 고희동 가옥 및 고희동 미술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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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한옥마을] 원서동 고희동 가옥 및 고희동 미술관

 

 

북촌한옥마을에 있는 원서동 고희동가옥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춘곡 고희영(1886~1965) 선생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에 직접 설계해서 만든 목조 한옥이며, 41년간 거주하던 곳입니다.

 

고희동가옥은 우리의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의 절충을 시도해 지었으며, 2000년대 헐릴 위기에 처했을 때 북촌 주민과 시민단체에서 보전운동을 펼쳐 등록문화재로 등록하고 종로구에서 매입해 2011년 복원 및 보수공사를 했습니다.

종로구에서 매입해 종로문화재단에서 전시 및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고희동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어 서울시 공공한옥에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과 고희동 미술관 전시모습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원서동 고희동가옥은 청덕궁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촌한옥마을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북촌에서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위치합니다.

담벼락 너머 봄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습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 담벼락에 붙은 춘곡 고희동 초상화

 

고희동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양화가로 새로운 조형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이고,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 나간 미술 행정가이자 미술 운동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희동 가옥 및 고희동 미술관 관람안내

 

관람시간(이용시간) 10:00~18:00(30분 전 입장마감)

휴무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 당일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없음

 

고희동 가옥 앞마당에는 봄꽃이 피어 있고, 고희동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담벼락의 대나무

 

마당에는 고목 한 그루와 이제 꽃이 피고 있는 목련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고희동가옥 안채 모습

 

고희동 가옥은 원래 안채, 사랑채, 문간채, 곳간채로 구성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변형과 반치로 훼손이 심했었는데요.

2000년 초반 종로구에서 매입 후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후 안채와 사랑채가 복원됐습니다.

 

정면 7칸, 측면 2칸 반의 일자형 안채가 동향을 하고 있고, ㄷ자형 사랑채가 안채를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긴 복도와 유리문, 툇마루와 대청의 실내공간화, 개량 화장실 등 근대 초기 한국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가옥입니다.

 

안채 우측으로 들어가면 안채와 사랑채의 ㅁ자형 건물 중간(안마당)엔 장독대 등이 있는 형태입니다.

 

고희동 가옥은 종로문화재단에서 위탁운영하며, 종로 구립 고희동 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고희동 화백의 작품세계 및 근대미술을 소개하는 전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미술관은 고희동 선생의 일대기를 전시한 자료실이 있고, 고희동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실 1~3, 그리고 사랑방과 화실에서 간단한 그리기 체험 등을 할 수 있게 꾸며져 있습니다.

 

고희동 미술관 자료실

 

춘곡 고희동 선생 약력

 

1886년 서울 비파동에서 역관 고영철의 셋째로 출생

1899년 관립 한성법어학교 입학, 프랑스어 공부

1901년 조혜임과 혼인

1904년 광학국 주사 판암관 6등 임명으로 공직생활 시작

1909년 미술연구를 위해 동경으로 출장,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 선과 입학

1910년 정3품 통정대부 임명

1914년 문학잡지 청춘 표지 및 삽화 그림

1915년 매일신보에 조선의 첫 서양화가로 소개,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

1917년 중앙, 보성, 중동, 휘문고보에서 도화교사로 근무

 

 

 

1918년 사화협회 조직, 총무 맡음

1919년 고려화회 설립

1920년 동아일보 기자 활동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 개최 등 서화부문 활동

1945년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 선출

1946년 조선문필가협회 결성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결성 및 회장 선출

1950년 대한미술협회 회장 추대

1954년 홍익대 명예교수 역임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 당선

1961년 서울MBC 초대회장 취임

1965년 10월 22일 80세 별세, 예총장

 

고희동은 중국어 역관이던 고영철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나 14세인 1899년 관립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4년간 수학해 우수하게 졸업했는데요.

 

당시 학교에서 프랑스 도자기회사의 장식기술자이자 미술교사였던 르미옹이라는 프랑스인을 만나 서양화를 처음 접했고, 그가 교관 에밀 마르텔의 초상화를 그리는 모습을 보며 영감을 받아 훗날 서양화가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어 서화협회와 대한미술협회를 창설하고 근대미술사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74세에 민주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인 참의원이 되어 미술계가 정치에 휘둘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인의 길을 선택해 그림 그리는 정치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희동 가옥의 역사

 

1918년 원서동 16번지를 매입, 직접 설계하여 건축

1941~1945년 개인전 후 화실 증축, 안채 지붕개조, 툇간 및 부엌 증축

1951~1953년 한국전쟁으로 피난, 아들 고흥찬이 원서동 17, 18번지 추가 매입해 개조 및 증축

1959년 소유권 이전, 고희동 가족은 제기동으로 이주

1975년 안채 및 곳간채 철거

1996년 소유권 이전, 안채 및 곳간채 복원

2002년 소유권 이전 및 철거위기

2004년 등록문화재 84호 등재

2008~2011년 종로구에서 매입, 안채와 사랑채 복원

2012년 고희동 가옥 개관

2017년 종로구립 고희동미술자료관 등록

2019년 종로문화재단 위탁운영, 고희동미술관 변경등록

2020년 고희동미술관 재개관

 

고희동 가옥의 배치

 

一자 형태의 안채ㄷ자 형태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ㅁ자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화실은 고희동이 그림을 그리거나 손님을 맞이한 공간으로 안채와 연이어진 사랑채 끝단에 위치하여 안마당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마당 본연의 기능을 생략하고 공간활용에 비중을 두어 화실을 재배치함으로써 동시대 근대 한옥과 구별되는 고희동 가옥만의 특징입니다.

 

 

 

안채 전면의 툇마루는 사랑채와 화실로 이어져 그 쓰임이 안마당으로의 출입을 보조하기보다 화실로 오가는 동선을 고려한 복도의 개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랑채 바깥으로 돌출된 툇마루와 이어내림 지붕은 서양식 베란다를 연상케 하고 당대의 일반적인 한옥과 비교되는 대담하고 독특한 형태입니다.

 

고희동 미술관 1전시실

 

동양화가로 전향한 춘곡 고희동이 직접 사용하던 백자 필세

고희동의 아들 고흥찬이 보관하다가 고흥찬의 아들 친구인 미술가 심철웅 교수에게 주었고, 그가 소장하고 있다가 고희동 미술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고희동의 작품, 천고수상

 

고희동의 작품, 계산무진

 

고희동과 함께 합작도를 기린 화가들

송은 이병직, 소전 손재형, 심산 노수현정재 최우석, 정재 오일영, 제당 배렴, 소정 변관식 등

 

고희동 부부가 생활한 안채 복도

건물 사이를 연결해 가족들이 안채와 바깥채를 오가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점이 돋보이는 곳입니다.

 

고희동 미술관 2전시실

 

한국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고희동의 '부채를 든 자화상'

 

동경예대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자화상 1점을 제외하고는 남겨진 유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1972년 소실된 줄로만 알았던 유화 2점이 이사한 제기동 골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낡고 썩은 캔버스에는 엷은 모시적삼과 베옷 바지를 입고 부채질을 하며 방 안에 앉은 고희동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었고, '1915, Ko. Hei Tong'이란 영어 사인이 기입되어 있습니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또 하나의 자화상은 짙은 감색 주루마기를 점잖게 입은 모습으로 다소 거칠게 칠한 점으로 보아 동경예대에 제출한 '정자관을 쓴 자화상'을 그리기 위한 습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 두 점의 자화상은 곧바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의해 입수되었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화로 가치를 인정받아 '부채를 든 자화상'은 국가등록문화재 4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

동경예대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작품으로, 원본은 도쿄예술대학에 있고 고희영 미술관에 전시된 건 복제본입니다.

 

안채에서 바라본 안마당

 

고희동 미술관 3전시실 

 

다시 동양화의 붓을 들다

 

고희동은 사양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1930년대 들어 완전히 동양화로 전향했습니다.

당시엔 서양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부족으로 후원이나 매매가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이 동양화로 전향한 이유일 것입니다.

 

아울러 동경 유학 이전에 안중식과 조석진 문하에서 화필을 잡으며 뿌리내린 동양화에 담긴 정신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희동은 산수화를 가장 많이 그렸으며, 금강산에 대한 애착이 깊어 이를 배경으로 한 실경산수화를 다수 남겼습니다.

그간 습득해 온 서양화법을 적용하여 전통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대상의 사실적 묘사, 원근법, 서양화식 채색법 및 음영법이 가미된 해로운 형식의 회화를 선보였습니다.

 

고희동이 1956년 71세에 그린 화필생애오십년첩

 

고희동은 화필생애 50년을 되돌아보며 짧은 감회와 그림을 담은 화첩을 제작해 아들에게 남겼는데요.

총 14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희동의 옥녀봉도와 유해금강도

 

이제 사랑채로 이동합니다.

 

사랑방에서는 고희동의 삶에 대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사랑채에 있는 고희동의 화실

큰 그림을 그리거나 손님을 맞이했던 곳으로 나만의 아트배지, 아트수첩, 춘곡 모던 자화상 그리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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