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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중심 전각들 -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

휴식같은 친구 2025. 5. 10. 05:00

창덕궁은 태종 5년(1405)에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습니다.

조선왕조 5대 궁궐 중 하나로 두 번째로 지어진 정궁이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굴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가장 오랜 시간 사용해 실질적인 법궁역할을 한 곳입니다.


창덕궁은 인접해 있는 창경궁과 경계 없이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요.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바 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배치와 아름다운 후원이 특징이죠.

 

 

창덕궁에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공간도 여럿 있는데요.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였고,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합니다.

 

창덕궁은 크게 5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입구인 돈화문, 내의원과 규장각 등이 있는 궐내각사, 인정전, 대조전, 희정당이 있는 중심권, 조선왕실의 마지막 공간이었던 낙선대 그리고 창덕궁 후원이 아닐까 합니다.

 

사진을 많이 찍다 보니 아래와 같이 창덕궁을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창덕궁 중심전각인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 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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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중심 전각들 - 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

창덕궁 낙선재, 조선의 마지막 왕실공간인 조용한 별궁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과 금천교, 중문인 진선문을 지나면 임금이 정사를 보던 인정전 앞 공간이 나오는데요.

행각들이 사다리꼴 모양을 만들어 마당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정문 앞에는 호위청, 상서원 등이 있고, 후원과 나건재로 들어가는 숙장문이 있습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들이 국왕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이며 오늘날의 경호처와 같은 조직으로 지금은 현판과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상서원은 옥새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는 각종 물건들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이곳 역시 현판과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창덕궁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인정문

 

인정문은 왕의 장례(국장)가 있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을 치렀던 곳으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인정문을 지나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과 품계석이 세워진 마당이 있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고요.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에서 따왔는데, 이름 그대로 어진 정치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곳입니다.

 

인정전 앞 품계석

 

조선시대 문무백관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궁궐의 정전 앞마당에 정렬한 좌우로 12개씩 24개의 돌입니다.

1품에서 3품까지는 정, 종으로 구분하여 6개가 세워져서 문무백과 12개 품계석이 세워졌고 4품에서 9품까지는 정, 종을 구분하지 않고 6개씩 12개가 세워졌습니다.

 

인정전은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고,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다고 합니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 고쳐지으면서 정면 칸을 5칸으로 늘렸고, 1505년(연산군 11년)부터 인정전과 선정전에 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 1506년(연산군 12년)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공사는 중지되었습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탔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대신해 조선 후기 내내 사실상 정궁 정전(법궁 법전)으로 궁궐을 상징했는데요.
이괄의 난, 병자호란의 화마도 비껴갔으나 1803년(순조 3년)에 화재로 불탔고 다음 해 다시 지은 뒤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보수했습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인 1926년까지 살면서 인정전 건물이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1994년에 원래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옆에서 바라본 인정전

창덕궁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으로 정말 규모가 크고 위엄이 서린 모습입니다.

 

인정전 내부 모습

신하들은 아래에, 왕은 일월오봉도 앞 어좌에...

 

실내 천장 가운데에는 금박을 입힌 봉황 두 마리가 걸려있습니다.

답도에도 봉황이 새겨져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근정전은 답도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천장엔 용이 걸려있고 대한제국의 황궁인 경운궁(덕수궁) 중화전은 답도, 천정에 용을 새기고 걸었습니다.

 

순종황제의 이어 이후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천과 커튼, 전등이 달렸다고 합니다.

창문과 문도 창호지 대신 유리로 바뀌었고, 건물 내부 바닥도 전통 전돌이 아닌 일본식 마루가 깔렸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변형이 더 심해졌는데요.

어좌와 일월오봉병이 사라지고 대신 작은 서양식 의자와 테이블, 일본식 금박기법과 자수기법을 적용한 커다란 봉황그림만 달랑 놓였다고 합니다.

또한 앞마당의 박석도 걷혔고 그 자리에 잔디가 깔렸으며 모란 같은 화초가 심어졌습니다.

어좌는 1960년대 초에,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 그리고 앞마당 박석은 1994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인정전에서 나와 낙선재와 창덕궁 후원 방향으로 향합니다.

숙장문을 지나치는데요.

 

숙장문은 궁궐의 외조 권역에서 내전을 볼 수 없게 만든 문입니다.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배치가 경복궁처럼 질서 정연하지 않은데, 돈화문을 지나 진선문으로 들어서면 정전 인정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내전 영역이 바로 보이게 되어 이를 가릴 담장과 문이 필요하여 지은 문이라고 하네요.

 

 

숙장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 6년) 8월에 당시 예문관대제학이던 서거정이 지었는데요.

'숙(肅)'은 '엄숙하다', '장(章)'은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입니다.

 

태종 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연간에 중건했으며, 순종황제가 이어한 직후인 1908년에 자동차 통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헐렸었고, 현재의 숙장문은 1999년에 지은 것입니다.

 

인정전 동쪽 공간

이곳엔 선정전과 희정당, 대조전, 성정각이 있고, 더 들어가면 낙선재와 창덕궁 후원으로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창덕궁 희정당과 대조전 입구

 

선정전 입구에서 바라본 창덕궁 인정전

중심 전각 답게 창덕궁 어디에서나 가장 위엄있고 두드러지게 보이는 곳이네요.

 

선정문 앞에는 멋스런 소나무가 있는 정원이 있고, 숙장문 앞에는 빈청이 있는데 창덕궁에서 유일한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있습니다.

 

창덕궁 선정문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의 정문으로 1층 목조 문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선정 자체는 선정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라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1405년(태종 5) 창덕궁 창건 때 편전 조계청을 세우면서 건립했고, 세조 7년에 선정전으로 바꾸면서 조계청 정문의 이름도 선정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했습니다.

 

선정전과 선정문 사이는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선정전이 혼전, 빈전으로 사용될 때 설치된 것으로 순종 때에 철거되었다가 1997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당시 선정전 행각은 남쪽으로 두 겹이 있었는데요.

현재 선정전 행각 밖에 또 다른 행각이 있었고 그 행각에 선정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들어 선정전을 혼전으로 자주 쓰면서 선정전과 선정문 일곽에 복도각을 만들었는데, 선정문의 서쪽 칸과 안쪽 행각 출입문인 돈례문의 중앙 칸을 복도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나 바깥 행각은 일제가 철거했고 이후 안쪽 행각을 개조하고 돈례문을 평삼문으로 고친 뒤 그 문에다 선정문 현판을 달았습니다.


안쪽 행각과 돈례문은 1990년대 후반에 조선 시대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바깥 행각과 본래 선정문은 복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선정문 동편에 있는 희정당 권역의 지형이 일제강점기와 현대를 거치며 조선시대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원래 선정문 자리에 재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창덕궁 선정전(보물)

 

창덕궁 인정전 동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창덕궁의 편전인데요.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던 곳입니다.

 

1405년(태종 5) 창덕궁 창건 때 처음 지어졌고, 당시에는 조계청으로 불리다가 1461년(세조 7) 12월에 선정전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정전을 포함한 창덕궁 전체가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고, 1608년(광해군 1)에 재건되었습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발생하면서 선정전은 다시 소실되었는데, 1647년(인조 25) 인왕산 아래에 있었던 인경궁 광정전을 헐어 창덕궁 선정전을 복원하였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의 편전으로 사용되어 주로 임금과 신하가 국정을 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 희정당이 편전으로 사용되면서 선정전은 경로잔치인 양로연과 왕비의 하례식, 혼전(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선정전 지붕은 유일하게 청기와로 장식했는데, 이는 회회청이라는 비싼 안료를 중국에서 수입해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정전 내부 모습

 

선정전 바로 옆에는 창덕궁 정당(보물)이 있습니다.

 

희정당은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주로 임금의 집무실(편전)로 이용되었습니다.

전각의 명칭인 희정은 '정치를 빛낸다.'라는 뜻입니다. 

1405년 창덕궁 건립 당시 승문당이었다가 1496년(연산군 2)에 희정당으로 바뀌었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고,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에 다시 재건하였습니다.

1833년(순조 33)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1834년(순조 34)에 재건하였고, 일제강점기인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희정당은 다시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소실된 희정당은 1920년에 복원되었는데, 경복궁 강녕전을 해체하여 희정당 복원에 사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희정당은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고 하네요. 

180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누마루 형태의 전각이었고, 마당에는 연못도 있었다고 합니다.

 

희정당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남쪽 행각에는 포치(porch)를 두어 차량을 댈 수 있도록 하였고, 건물 내부를 구성했던 대청과 온돌방은 응접실과 접견실, 회의실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희정당 건물이 보입니다.

 

창덕궁 희정당 모습

 

규모가 상당한데요.

건물의 크기가 원래 15칸에서 55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건물 내부에 비치된 가구들은 서양식으로 교체되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었습니다. 

희정당에는 옛 강녕전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희정당 지붕의 합각면에는 '康(강)', '寧(녕)'이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조각되어 있다네요.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본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집무를 보았던 곳으로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건물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희정당 뒤쪽으로 가면 신평문이 있고, 그 뒤에 대조전과 경훈각, 함원전이 있습니다.

 

현재 대조전은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작년 7월부터 시작해 오는 6월 1일까지 진행되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6월 1일까지는 대조전, 경훈각, 함원전 관람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찍었던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창덕궁 선평문

대조전 정문으로 화평을 세상에 펼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405년(태종 5년)에 대조전과 함께 지어졌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복구, 인조반정으로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했습니다.

이후 순조 때 다시 불탄 것을 헌종 때 복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1월에 창덕궁 내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20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요.

당시 경복궁 양의문 건물을 헐어 옮겨다 지었는데 그 때문에 조선 시대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의 왕의 침전으로 희정당의 북쪽에 있습니다. 
건물 동쪽으로 흥복헌, 서쪽으로 융경헌이 바로 붙어 있고, 서북쪽에는 경훈각이 있으며, 서로 복도를 통해 연결되고 있습니다.
대조전 현판 글씨는 순조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대조전에 왕비가 살았던 곳이지만, 실제로는 왕도 같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창덕궁 창건당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인조반정 때,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어 지금의 대조전은 1920년에 복구한 것입니다.

당시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다 지었기 때문에 본래의 대조전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합니다.

 

1926년 4월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여기서 승하했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이후 명목상 순종이 가지던 이왕 위를 물려받은 의민태자와 이방자가 가끔 조선에 올 때 머물렀으며, 일제강점기 중 마지막으로 들른 1939년 10월 이후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전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대조전과 붙어 있는 흥복헌

 

대조전의 부속 전각으로 흥복은 '복을 불러일으킨다'라는 뜻이며, 임금이 신하를 만나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1910년 8월 22일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이곳에서 열렸고, 이날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었던 날입니다.

 

대조전 뒤쪽으로는 곳곳에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습니다.
당시 왕족들이 후원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조전 뒤쪽에는 경훈각과 함원전이 있습니다.

 

경훈각은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의 부속침전으로 복도를 통해 대조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층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1층은 광세전, 2층은 징광루)이라 여러 왕과 왕비들이 2층을 여름에 더위를 피하고 한가롭게 쉬는 장소로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당시엔 1, 2층 모두 청기와를 올림)

 

조선 초에 지어졌으나 전쟁과 화재로 여러 번 지어졌다가 현재의 것은 1920년에 경복궁 내전 일곽의 만경전 건물을 헐어왔는데 그 때문에 조선 시대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함원전은 경복궁 교태전에 있는 것과 동일한 이름인데요.

창덕궁에도 대조전 동북쪽에 붙어있는 건물입니다.

 

원래는 없던 전각이었으나 1917년 창덕궁 대화재로 1920년 재건할 때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 대조전을 지으면서 교태전에 딸린 건순각도 함께 뜯어와 함원전으로 지어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희정당과 대조전 일원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성적각으로 이동했습니다.

 

창덕궁 성정각

 

창덕궁의 동궁으로 대학의 성의, 정심에서 앞글자를 따와 붙여 성심성의껏 바른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의미의 왕세자의 공부방이었던 곳입니다.

숙종 대 이전에 지어진 곳으로 보이고, 영조부터 고종까지는 세자보다는 왕들이 많이 활용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 영향으로 창덕궁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궐내각사에 있던 내의원을 성정각으로 옮겨오기도 했습니다. 

 

성적각 내부와 바깥담장이 보이는 풍경

 

성정각의 부속건물인 2층의 희우루

보춘정 현만은 남쪽에, 희우루 현판은 동쪽 면에 붙어 있습니다.

 

보춘은 '봄이 옴을 알린다'라는 의미로 봄은 동쪽을 상징하기 때문에 동궁 건물 이름으로 쓰였고, 희우는 '비가 내려 기쁘다'라는 의미로 이 누각을 중건할 때와, 완성 후 임금이 처음 행차할 때 비가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성정각 뒤 동쪽에 있는 관물헌

관물은 '만물을 보고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는 의미로 넉넉하고 맑은 마루란 뜻이라고 합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을 자주 만나고 문신들을 시험보게 했다고 합니다.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공부를 했고, 헌종은 몸이 아플 때 이곳에서 진료를 받았고, 고종 때에는 흥선대원군이 궁에 올 때 자주 이용했으며 순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성정각 밖으로 나오면 창덕궁 동쪽 끝 지점이 나오고 창덕궁 후원관람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창덕궁 후원은 창덕궁 북쪽에 있는 조선시대 궁중정원으로 왕실 가족의 휴식공간 혹은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인데요.

태종이 조성했고, 세조 대에 확장, 성종 대에 건립된 창경궁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아름다운 정자를 만들었고, 4개의 골짜기에는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영역이 펼쳐지고 이 연못들을 기준으로 공간이 나뉘어집니다.

 

현재 남아 있는 연못으로는 부용정의 부용지, 애련정의 애련지, 존덕정 앞 반월지, 관람정 앞 관람지 등이 있고, 과거 이곳에서 왕실 가족들은 뱃놀이와 낚시 등을 즐겼다고 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것을 포함하여 군사훈련 등의 활쏘기 행사,  꽃구경을 하였으며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도 했습니다.


창덕궁 후원 - 부용지와 주합루, 애련지와 의두합, 연경당

창덕궁 후원 - 존덕정과 펌우사, 옥류천

 

창덕궁 담장너머로 이어지는 창경궁 방향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