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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강북권 여행

성균관과 서울문묘 석전대제(in 성균관대)

by 휴식같은 친구 2019.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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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 내에 있는 '성균관과 서울문묘와 석전대제'

 

 

성균관대학교 서울캠퍼스에 갔다가 우연히 들린 성균관과 서울문묘.

대학 내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요.

 

성균관대학교 캠퍼스투어 (가을풍경)

 

알다시피 성균관조선시대 인재양성을 위해 서울 명륜동에 세워진 국립대학격인 유학교육기관입니다.

태학, 반궁, 현관, 근궁, 수선지지라는 명칭으로도 불리웠다고 합니다.

 

그 이전엔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많이 외웠던 고려시대 국자감, 신라시대 국학, 고구려의 태학이 성균관의 코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균관대학교 내에 있는 성균관과 서울묘 그리고 석전대제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에서 100여 미터 들어오면 서울문묘 정문이 있습니다.

 

이곳으로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어서 성균관대 입구에 있는 웨딩홀 앞에서 들어가거나 성균관대학교 내로 들어가서 비천당을 통해 들어가야 합니다.

 

서울문묘 지역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적 세계관과 관련된 곳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공간입니다.

 

 

문묘에서는 매년 2월과 8월에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에게 석전제를 드리는데 이를 석전대제 또는 문묘대제라고 합니다.

석전대제는 일반적으로 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제사의식이며, 문묘에서 치러지는 석전대제를 위한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합니다.

 

이 석전대제는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그 원형이 남아있지 않고 현재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과 그 앞에 있는 비천당 모습

비천당 우측으로 서울문묘와 성균관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천당은 조선후기에 건립된 성균관의 별당으로, 유생들의 학습장소, 임금이 성균관에 친립하여 과거를 볼 때 장소로 사용했던 공간입니다.

 

 

1946년 9월 이후 성균관대학에서 비천당을 대학본부로 사용하기도 했고, 옆 건물은 대학도서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본 건물은 1988년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 하네요.

 

비천당이란 이름은 주자가 성인을 찬한 글 중 비천대유라는 글귀에서 인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양 옆의 재실에는 일량재, 벽입재라 명명하였는데 모두 송시열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 문묘에는 대성전 중심으로 하는 제사공간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공간(성균관)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진입하면 명륜당 건물 후면이 보입니다.

 

 

성균관 및 서울문묘 관람안내

 

이용시간 11~2월 09:00 ~ 17:00, 3~10월 09:00~17:30

휴무일 없음

주차장 없음

입장료 무료

 

명륜당 모습

명륜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이곳이 성균관의 교육공간입니다.

 

1898년(조선 태조 7)에 설립하여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 최고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명륜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의미로 현판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명륜당은 3동을 하나로 연결하여 지었고,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 날개채에 선생들이 기거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는 20칸의 긴 건물에 앞뒤로 툇마루를 설치한 독특한 양식입니다.

 

동재모습

그 앞에 있는 나무사이즈에 감탄사가 나옵니다.

 

서재 모습

 

성균관우리나라 최고 학부명칭으로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이라 개칭한데서 시작됩니다.

 

그 뒤 1308년에 충령뢍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히면서 성균관이라 개칭하였습니다.

그 후 1356년(공민왕 5)에 배원정책에 따라 국자감으로 환원되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네요.

 

 

이후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그대로 성균관은 존치되었습니다.

 

한양천도에 따라 현재의 명륜동에 1398년에 3년만의 공사 끝에 대성전과 동무와 서무의 문묘를 비롯한 명륜당, 동재, 서재, 정록소 등의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명륜당 뒤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문무를 겸비하며 수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륜당 앞에는 거대한 크기의 서울문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으젓하게 서 있습니다.

 

1519년(중종 14)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것이라고 하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곳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500년 된 동쪽(좌측)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5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은행나무도 위풍당당하긴 마찬가지네요.

 

명륜당 마당에 있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들

 

한 그루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인데요.

성인 5명 이상이 팔을 벌려 감쌀 수 있는 두께입니다.

 

두 그루가 작은 숲을 이루었네요.ㅎㅎ

 

은행나무들은 수령이 오래되어 빈 공간이 생겼는데 시멘트 같은 것으로 내부를 채워주고 있네요.

 

명륜당 앞 담을 지나면 석전대제(문묘대제)를 지내는 성전이 나옵니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무, 서무가 있는 영역이 문묘, 즉 제사공간입니다.

 

 

남쪽의 삼문은 제례 등의 행사에 사용하는 문인데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오도록 했고, 가운데 문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상징적인 문이라고 합니다.

 

대성전 서쪽에는 제사음식을 차리는 전사청, 하급 관원들의 관청인 수복청,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 등 부속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동무고, 서무고라고 적혀 있는 제기고를 보면 제기들을 사용 장소별로 분류하여 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무 모습

 

대성전과 동무, 서무에는 공자를 비롯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성현 133명의 위패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성전에만 39명의 위패를 모시고 동무와 서무는 비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교 교육기관 안에 성현들을 모시는 유래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가지만, 서울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처음 지었다고 합니다.

 

동무 앞 나무아래에서 여대생들로 보이는 친구들이 무용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앞 마당의 묘정비각 비문(사진 오른쪽)은 문묘를 창건하고 고쳐 지은 연혁을 기록한 것이고, 대성전의 현판 글씨는 석봉 한호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동무 건물에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붙이는 월동준비를 하고 있네요.

 

 

성균관대학교 캠퍼스투어를 하다가 우연히 방문한 곳인데요.

역사책에서만 봐왔던 성균관과 문묘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을풍경이 멋진 성균관을 따라 산책하듯 구경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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