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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 다산 정약용 유적지, 다산초당

by 휴식같은 친구 2020.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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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 다산 정약용 유적지,  다산초당

 

 

다산유적지 사의재와 다산박물관을 둘러보고 이동한 곳은 강진에서 가장 오래 머물며 많은 저서를 완성한 다산초당으로 이동했습니다.

 

강진은 조서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을 머문 유적지입니다.

그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다산초당이죠.

 

[남도답사 일번지) 다산 정약용의 첫 유배지, 강진 사의재

강진 남도답사 일번지, 다산박물관

 

 

다산을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뜨자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 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답니다.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가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에서 그 옛날 다산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궁금하게 여기며 올라갔네요.

 

다산초당은 귤동마을 주차장에서 300여 미터로 걸어서 15분 정도 소요되는 산 중턱에 위치합니다.

더운 날씨에 걷기가 조금 불편한 거리입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는 1,100m로 걸으면 30여분이 소요되는데요.

더워서 걷는 것은 포기하고 차량을 이용해서 이후 방문했습니다.

 

 

다산초당 입장료나 주차장 등은 모두 무료로 개방되어 있고요.

관람시간은 09:00~1800, 휴무일 없이 연중 개방하고 있습니다.

 

다산초당 입구에 무료주차장이 있으니 주차 후 도보로 이동해야 합니다.

다산초당길에 있는 한옥건물들

 

다산회랑이라고 적인 회관인 듯...

 

신일각이라고 하는 한옥인데요.

문화재로만 적혀있고 다른 정보는 찾을 수가 없네요.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에 있는 다산문화원 다산처럼 카페

한방차를 파는 찻집입니다.

 

전. 강진군수인 윤동환 씨가 지은 목민심서와 다산 정약용 책자를 판매하고 있네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날씨가 선선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걸어서 가보는 것도 다산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련사는 동백나무 숲으로 유명한 사찰인데요.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에 있는 대흥사 말사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세운 사찰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수시로 왕래한 사찰이기도 하며 정약용의 저서인 '만덕사지'가 바로 백련사를 말한다고 합니다.

 

한여름 더운 날 이런 산길을 올라가는 길은 고행입니다.

석자나 튀어나온 딸아이를 꼬셔서 열심히 데리고 올라갑니다. ㅎㅎ

 

 

다산의 제자 금계/순암 윤종진의 묘

 

다산의 18제자 가운데 한 명인데요.

이곳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기는데 18제자의 역할이 컸다고 전해집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되자 순암은 18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를 조직해 평생동안 차를 만들어 스스에게 보냈고, 이 차는 금릉다산향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윤종진은 1867년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69년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을 모아 참여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백파 신헌구와 교류하였다고 합니다.

 

윤종진 묘 앞에는 뿌리가 다 드러난 길이 있는데요.

일명 뿌리의 길이라고 합니다.

 

습기가 많아 조심스럽게 걷지 않으면 미끄러워질 수 있는 길이네요.

다산초당 진입로를 강진군에서 정비한다고 하는데 필요성은 인정되나, 옛길 그대로 남겨 놓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쉬엄쉬엄 20여 분을 걸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다산초당 서쪽에 있는 다산초당 서암이라는 건물입니다.

 

 

서암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공간입니다.

당시 18세자들의 거쳐였던 곳이네요.

원래는 윤단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다산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고 하네요.

 

서암의 표지는 다성각,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입니다.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지은 것입니다.

 

이 서암은 본래의 짚을 덮은 본래의 모습으로 정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서암과 동암 사이에 자리한 다산초당 모습입니다.

정약용이 8년여간 강진에서의 삶에서 안정을 찾고 후진양성과 집필활동을 한 곳이죠.

 

이곳에서 다산학단으로 불리는 18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였습니다.

18제자는 그의 집필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답니다.

 

다산초당은 원래 목조 초가였는데 1936년에 노후로 인해 붕괴되어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중건한 것입니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적어 준 글씨인데 집자해서 모각한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산초당 근처에는 '정석'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 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다산초당 옆에 있는 작은 연못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작은 산은 연지석가산으로 다산 4경이라고 부르는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기산 중 하나입니다.

원래 작은 연못을 넓히고 바닷가의 조약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연못에서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고 하며,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전해집니다.

 

다산초당을 지나가면 송풍루라고 불리던 다산초당 동암이 있습니다.

다산이 다양한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은 곳입니다.

 

다산은 대부분의 시간을 동암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이곳에서 완성하였습니다.

 

다산동암의 현판은 다산이 적은 것으로 다시 세우면서 모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동암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천일각이 나오고 이곳에서 더 1km 정도 걸어가면 백련사가 나옵니다.

백련사는 더워서 걸어가기를 포기하고, 다시 걸어 내려가 차로 이동했습니다.

 

[강진여행] 통일신라시대 천년사찰, 강진 백련사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의미로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돌아가신 정조임금과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백련사의 혜장선사유배생활 중 벗이자 제자였는데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고 전해집니다.

800여 미터 길은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이 있습니다.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강진만 풍경

 

조선시대 후기의 천재학자, 다산의 거의 모든 저서를 집필했던 다산초당

다녀오는 기분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좌절과 절망의 유배길이었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실학을 집대성한 저력을 보여준 학자입니다.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여행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다산 정약용 유적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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