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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의 현장,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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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의 현장,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지난번 친구들 모임이 있어서 평택으로 가는 도중,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가 보이길레 잠시 들러 구경하러 들어갔습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은 1919년 3.1 운동에서 개신교가 우리나라 민족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주는 사건으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은 역사적 장소입니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대부분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들어본 적은 있을 것입니다.

그 역사적 현장에 있는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와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기념관을 담았습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는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50, 서해안고속도로 발안 IC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야외 유적지는 언제나 구경이 가능한데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기념관은 관람시간10:00~18:00입니다.
휴무일은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당일이며, 입장료는 무료, 주차장도 무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로 들어가는 제암리 입구에는 3.1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니만큼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습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발생한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을 기억하고, 화성지역 애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관한 기념관입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떼 화성에서도 개신교를 중심으로 민족의 광복과 자주, 독립을 선언하며 화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요.
당시 화성 지역민들은 식민지배 통치기구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 2명을 죽이는 등 식민통치에 강하게 저항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일본의 아리타 중위는 1919년 4월 15일, 군인 1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와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제암리교회로 불러 모은 후 불 질러 학살하였고, 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독립운동가 일가족을 참살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교회에 영문도 모르고 갔다가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대한국인들, 남편을 찾아 교회로 온 두 명의 부인까지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간, 은행나무잎은 거의 떨어진 상태,
3.1운동의 참상이 있던 지역인 데다, 찾는 이도 많이 없어 쓸쓸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모습이네요.

입구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순국기념탑
잠시 목례로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기려봅니다.

 

 


이곳은 화성 지역민들의 독립운동의 현장이고, 한국의 독립선언을 일본이 폭력적으로 탄압한 곳으로 1982년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 순국한 29명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탑이네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동상
영국인 선교사이면서 수의학자로 3.1 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해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거둔 분이라고 합니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들은 스코필드는 수원역까지 열차를 타고 와서 경계가 삼엄한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로 제암리까지 왔다고 하는데요.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를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국외에 보내 일본인들의 비인도적인 침략행위를 알렸다고 합니다.

제암리교회 앞 너른 마당

당시 제암리 교회에서 희생당한 23인을 상징하는 조각물입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빨갛게 익은 단풍은 당시의 아픔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요?

제암교회 앞에 있는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멈춰진 시간 4.15을 기억하다!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화성지역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소 과격한 양상으로 시작된 것이 시발점이었네요.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국과 일본인 가옥들을 파괴하고, 일본인 2명을 처단한 것입니다.

제암리, 고주리 학살사건은 커티스, 테일러, 언더우드, 스코필드 등의 재한 공관과 기자, 선교사 등에 의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해외 여론이 악화되자 일제는 학살의 주범인 아리타 도시오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여 여론을 무마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1919년 8월 21일 일제는 아리타의 만행은 학살 행위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아닐 수 없네요. ㅜㅜ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화성지역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4천여 명이지만, 화성지역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사람은 126명이라고 합니다.
후손이 없거나 공적심사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굴, 선양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다소 안타깝습니다.

1982년 제암리 유해발굴현장
당시 일본 경찰은 교회와 제암리 가옥 30여채를 불태웠고, 살벌한 감시 때문에 어느 누구도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들은 스코필드 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제암리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봉분도 없이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이후 1946년에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1959년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등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화성지역의 독립운동가들

추모관

독립운동 훈장들

밖으로 나오면 당시 제암리 교회학살사건에 희생당한 합동 순국묘지가 있습니다.

1982년 유해발굴한 23인을 함께 모시고 있는데요.
다음 해 7월에 기념관과 새 기념탑이 세워졌습니다.

 

3.1정신 교육관


일제강점기만 생각하면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가 생각나서 화가 나는데요.
화성 제암리에 오니 그 기운이 더 올라옵니다.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국력, 힘 있는 국민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좌우, 네편내편 가르지 말고, 우리 민족을 생각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현명함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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