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 봄 풍경, 명성황후의 흔적 찾기
지난달에 여주여행을 다녀오면서 들린 명성황후 생가.
생가에서 명성황후의 일생을 보고나서 고종과 가례를 올린 운현궁을 다시 한번 다녀와야겠다 싶어 찾았습니다.
회사 근처라 마음만 먹으면 산책하듯 다녀오면 좋은데, 마음먹어야 다녀와지는 것 같습니다.
운현궁은 조선의 26대 왕으로 등극한 고종이 12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잠저이면서,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로 10여 년간 아들을 대신에 섭정한 작은 궁궐이었습니다.
고종은 25대 왕인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가 후계자로 12살에 불과하던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을 지목하였죠.
흥선군 이하응은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의 아들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기간 동안 왕실 종친들이 화를 입었지만,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며 난을 그려 파는 등 처신을 잘해서 살아남아 대원군까지 오르게 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운현궁의 봄 풍경을 담았습니다.
운현궁이 있는 안국역 사거리 앞
이제 날씨가 제법 더워지고 있어 금세 여름이 될 것 같은 날씨입니다.
운현궁 관람안내
관람시간 4월 ~10월은 09:00 ~ 19:00, 동절기에는 09:00 ~ 18:00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정상 개장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없음
흥선대원군은 부패한 유림의 온상인 서원을 철폐하고, 상민에게만 부과했던 군포를 양반까지 넓히는 호포제를 실시했습니다.
과감한 개혁정치로 양반들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국가 재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때 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했는데, 막대한 재정이 들어가면서 원납전이라는 것을 가두고 강베주역을 시키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외교에서는 외세의 개방요구가 거세지면서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와 같은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고, 천주교 탄압과 쇄국정책을 강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던 고종은 척사파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10년의 세도정치를 마감했습니다.
쇄국정책에 있어서 대립했던 명성황후는 개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일본의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으나, 불평등 조약이라는 비판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임오군란으로 민씨 정권은 위기를 맞게 되었고, 명성황후는 장호원과 충청도로 피란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복귀를 하고 민비 장례까지 치르려고 했으나, 민비는 청나라와 접촉해 대원군을 납치하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민비는 다시 환궁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갑오개혁이 한창 진행주이던 1895년(고종 32)에 일본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극악무도한 을미사변입니다.
수직사
운현궁 정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입니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흥선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경호가 필요해지자 궁에서 경비병이 파견되고, 관리인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현재 수직사의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운현궁은 크게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으로 나누어 집니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의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쓰였습니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은 사대부 집이라기보다는 궁궐 내전에 가깝다고 합니다.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1863.12.13.)한 지 한 달쯤 지나서 대왕대비의 하교로 운현궁의 신·증축 공사는 시작되었고, 9개월 만에(1864.9.) 노락당과 노안당 건물을 준공했다고 합니다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나 되고 4개(경근문, 공근문, 정문, 후문)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구 TBC 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합니다.
대원군의 위세와 운현궁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고종 3년(1866) 3월 21일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운현궁에서 치른 사실입니다.
가례 준비 일체를 노락당에서 하였다고 합니다.
노안당 정원에는 철쭉과 작약으로 보이는 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즉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민치구의 딸로, 흥선대원군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이 고종 비를 간택할 때에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된 자신의 11촌 아저씨인 민치록의 딸을 천거, 왕비로 책봉하게 하였는데 이가 바로 명성황후입니다.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아이러니하게도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탄압을 했던 천주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1887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되자 세례를 받았다고 하네요.
노안당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습니다.
노안은 논어에서 ‘노자를 안지하며’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노안당은 노락당과 함께 1864년(고종 1년) 3월에 상량하고, 같은 해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노안당 뒤에는 노락당이 있습니다.
운현궁의 중심건물이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치른 곳입니다.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는데요.
그 규모는 궁궐에 비하여 손색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였다고 합니다.
노락당 안에는 방과 부엌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였습니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고,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으며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10여 년간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허수아비처럼 있었고, 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명성황후의 일가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어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습니다.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으로 이어지는 골목엔 봄이 가득 내려앉은 모습니다.
노락당 뒤쪽 건물 모습
동측면 북쪽 3칸에는 퇴가 달려있어 바깥으로의 출입에 편의를 도모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도 배면과 같은 형태의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노락당 뒤에 있는 이로당
이로당은 운현궁의 안채로 쓰인 건물로서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 6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로당 동측 정원 모습
운현궁 유물전시관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전시를 통해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말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꾸며 놓았습니다.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가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운현궁의 각종 생활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부터 국권이 강탈될 때인 1910년까지의 국내외 연표입니다.
운현궁 전체 배치도
이로당과 노락당 그리고 노안당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입었던 의복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쇄국양이
척화비
1871년(고종 8)에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새운 비입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구 열강들의 통상압력을 비롯, 남연군의 묘 도굴사건 등이 발생하여 통상을 강력하게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적어 두었던 것이죠.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만년에 경고하노라"
당시 이런 척화비 글귀를 읽으면 정말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개방은 꿈에도 생각을 못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듭니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으로,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경한 통상수교거부정책과 조선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으로 프랑스 해병 160명은 정족산성을 공략하려다가 잠복하고 있던 500여명의 조선군 사수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습니다.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우어, 척화비를 만드는 등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가례를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명성황후 모습
운현궁 마당 모습
조선말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고민하면서 정치를 해야 했던 고종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쇄국이냐, 개방이냐에 갈라졌던 조선의 시대적 상황이 녹록지만은 안 했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매번 운현궁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부국강병을 실시하며 개방하는 방향으로 몰로 갔다면 조선의 미래가 어떻게 변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서울시 강북권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야경명소, 낙산공원 야경 (46) | 2021.05.07 |
---|---|
한양도성 산책(혜화문-낙산공원) (58) | 2021.05.06 |
서울 인왕산 수성동계곡(겸재 정선의 수성동 현장) (38) | 2021.05.04 |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 사직단 풍경 (52) | 2021.04.30 |
서울 조계사, 조계종 총무원 직할교구 본사 (54) | 2021.04.12 |
성북동 맛집, 성북동집 칼국수 (46) | 2021.04.11 |
종로 가볼만한 곳, 서울 우리소리박물관 (58) | 2021.03.05 |
창경궁 나들이(조선궁궐) (52) | 2021.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