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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제주의 중심,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by 휴식같은 친구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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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중심,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제주 역사투어, 삼성혈과 제주성지를 관람하고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를 관람하기 위해서 내려왔습니다.

세 곳 모두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제주편에 소개된 곳입니다.

 

탐라국의 시조/발상지, 삼성혈

(제주성지)과 제이각 풍경

 

작년 제주여행 때에도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를 방문했는데, 당시에 탐라국입춘굿을 비대면으로 실시하면서 관람을 못하고 관덕정만 구경하고 간 적이 있습니다.

 

제주목관아는 지금의 관덕정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미 탐라국 시절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덕정 1448년(세종 30) 안무사 신숙청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된 정자로 제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고건축입니다.

조선시대 제주 정치와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제주시 원도심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이번엔 자세히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를 견학했는데요.

겨울에도 멋진 모습의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모습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앞에는 옛날엔 거대한 광장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상태이며 관덕정 광장을 복원하기 위한 오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상태에서 녹록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먼저 관덕정부터 관람했습니다.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중 기단 위에 새운 정면 5칸, 측면 4칸인 단츨의 팔작지붕 형태입니다.

관덕정은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요.

이곳 광장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지은 건물입니다.

 

 

조선시대 7차례에 걸쳐 중수하였고, 1924년 일본인이 보수하면서 15척이나 되는 곡선의 처마를 2척이나 줄여 보수하니 전통적인 멋은 사라졌으며, 1969년에 10번째 중수 시 대대적으로 해체하여 새로 보수하고 주위에 문을 달아 흰 페인트칠을 하여 관덕정의 위용은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관덕정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으로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관덕정 앞 기간지주

 

기를 매달기 위해 세우는 돌받침 기둥인데요.

제주목 방어사의 황수기를 높이 걸어놓기 위한 깃대의 받침 기둥입니다.

 

관덕정 앞에 있는 2기의 돌하르방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2-1, 2-2호로, 삼성혈 건시문 앞에 있는 2기의 돌하르방과 같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48기에 속하는 돌하르방입니다.

 

돌하르방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성문 입구에 세워진 석상으로 제주읍성 동서남 3개의 문 밖에 각 8기씩 24기가 세워져 있었고, 정의현성, 대정현성의 3개의 문 밖에 4기씩 12기(총 24기)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현재 제주도에 남아있는 하르방은 관덕정, 삼성혈, 제주시청, 제주대 박물관 등 제주 시내에 21기, 서귀포시 표선읍 성읍리에 12기,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안성리, 보성리에 12기 등 모두 45기가 남아 있고,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에 2기가 있어 47기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1기는 제주읍성 남문 밖에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습니다.

 

 

이곳엔 4기의 돌하르방이 있는데, 관덕정 앞의 돌하르방 2기는 원래 제주읍성 서문 밖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고, 제주목관아 야외전시장에 있는 2기는 제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관덕정은 해방 후 1948년 9월에 관덕정은 제주도의 임시 도청으로, 1952년도에는 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참으로 순탄치 못한 역정을 견디어 오다가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관덕정에는 3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관덕정 정면에 있는 '관덕정' 현판과, 내부 천정에 '호남제일정', '탐라형승'이라고 적힌 현판입니다.

 

관덕정 현판은 안평대군이 처음 썼으나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이덕형의 장인이기도 한 이산해가 쓴 현판이 남아 있습니다.

 

관덕정 마루 모습

관덕정 실내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작자 미상이나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관덕정은 창건 이후 제주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1901년에 일어났던 신축교난 당시 지도자였던 이재수가 관덕정 광장에서 효수되었고, 1947년 2월 10일에는 제주 시내의 중학교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양과자를 먹지 말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근세의 역사에서는 4.3 항쟁 당시 무장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이 며칠이나 내걸려 있었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관덕정에서 바라본 제주 시내와 제주목관아 입구 모습

 

제주목관아의 입구, 첫 대문은 관아의 관문인 외대문이며, 2층 누각건물로 종루로도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외대문 앞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순조 34년(1834) 한응호 목사가 종전에 있던 비석을 대체하여 세운 것이며, 이곳을 지나갈 때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의 비석입니다.

 

 

제주목관아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18:00 (입장마감은 17:30까지)

휴무일 연중무휴

입장료(관람료) 성인 1,500원, 청소년 및 군인 800원, 어린이 400원
(10인 이상 단체는 각각 1,000/600/300원)

6세 이하, 65세 이상, 장애인, 유공자 등은 무료관람

주차장 주차요금 무료(관덕정 대각선 지점에 위치)

 

제주목관아는 이미 탐라국 시절부터 성주청 등 주요 관아시설이 있었던 곳입니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 관부 화재로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다시 지어지기 시작했고, 여러 번의 증.개축을 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훼손되어 관덕정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제주도청과 제주지방법원, 제주지방검찰청 등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제주시에서는 제주목관아를 복구하기 위해 1991년부터 수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 연희각, 우련당, 귤림당 등의 건물터와 유구가 확인되고 유물도 출토되었습니다.

 

1993년에 국가사적 380호로 지정되었고,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1999년 9월에 시작한 복원사업은 2002년 12월에 완료하였습니다.

 

외대문을 지나면 전면에 중대문이 보이고, 그 안에 좌측에 우련당, 우측에 영주협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주목관아는 정치와 행정, 문화를 아우르는 복합공간으로서 기능은 물론 경노, 입신양명의 실현 등 민관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열린 광장으로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외대문과 나란히 있는 공간은 회랑과 제주목 역사관으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군뢰청과 호적방

군뢰청은 죄수를 관리하는 군졸이 대기하고 업무를 보던 곳이며, 호적방은 호적대장을 보관하는 장소인 호적과와 달리 관아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서원이 민원인들에게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던 곳입니다.

 

제주목 역사관

제주목과 제주목사, 제주읍성 이야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주목관아, 제주성 되다.

 

목(牧)이란 고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조직으로 지방의 중요한 지역에 설치되었습니다.

고려 성종 2년(983)에는 12목, 현종 9년(1018)에는 8목을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기에 20목을 두었습니다.

 

 

도에는 관찰사를 두었고, 하부 조직으로 부(종2품)와 대도호부(정3품), 목(장3품), 도호부(종3품), 군(종4품), 현(종5품)을 둔 것이죠.

당시 전라도 관찰사 아래 소속된 목은 광주목, 나주목, 능주목(화순군), 제주목이 있었으며, 제주목사가 파견되어 행정을 펼쳤습니다. 

이후 태종 16년(1416)에 제주의 지방행정조직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삼읍 체제로 개편되어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제주목사, 286명 제수받다.

 

조선시대 제주목사 임기는 2년 반(30개월)이었으나 문책 등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였다고 합니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이고, 부임을 명 받고도 오지 못한 이가 12명이나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관리임용에 상피제가 적용되어 제주출신의 목사는 없었다네요.

 

제주읍성, 축성되고 사라지다.

 

제주읍성에 대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주성지)과 제이각 풍경

 

재주목 관아 중대문

 

중대문 옆 오래된 나무가 제주목관아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네요.

 

연못과 우련당 그리고 그 뒷건물은 홍화각입니다.

 

연못은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목사가 성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개 발생했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며 만든 곳이라고 합니다.

 

우련당

이수동 목사가 연못을 만든 뒤 세운 정자로 연회를 베풀고 공물을 봉진 하던 장소입니다.

 

교방지와 영주협당

영주협당 앞에는 교방지가 있는데, 관기와 악공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곳이라고 합니다.

 

영주협당은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입니다.

군관의 수는 15인이었다가 이후 10인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영주협당의 군관집무실 모습

그리고 심약방은 심약과 의생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교방은 관기들에게 악기를 다루던 곳입니다.

 

애매헌지

애매헌의 건립시기와 기능은 미상이나 건물은 8칸이었고, 18세기 문헌들에서 없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홍화각

절제사(목사가 겸한 군사직)가 사무를 보던 영리청으로 1435년(세종 17)에 창건하고 이후 중수하기도 했습니다.

 

홍화각이란 어인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홍화각은 탐라고각이라 불릴 정도로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홍화각 옆에는 예방이 소속된 서리들이 집무를 보던 예리장방지와 진상에 필요한 전복, 해삼, 표고버섯, 미역, 비자, 동백, 오징어, 은어, 민어, 청어, 오미자 등 각종 진상품을 보관하던 예고지가 있습니다.

 

연희각

홍화각 뒤에 있는 건물로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로 불렸습니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라고

 

연희각 앞에는 정당의 좌우에 긴 집채인 회랑지와 관노비가 거처하는 노비행랑지, 지방수령의 처첩이 거처하는 동헌내아지가 있습니다.

제주목의 경우 목사의 처첩이 아서 거처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간혹 부임한 목사의 친인척이 유람하기 위해 ㅂㄴ문하거나 자제들이 안부를 묻기 위해 왔을 때 거처하였다고 하네요.

 

귤림당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던 장소입니다.

원래는 5칸이었으나 정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귤림당 내부 모습

 

제주목관아 가장 뒤쪽엔 망경루가 있습니다.

 

망경루 측면과 형장 시설

 

망경루는 북두성을 의지하여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보며 그 은덕을 기리는 신지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제주 앞바다에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랍니다.

 

망경루 1층 내부에는 탐라순력도 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1702년(숙종 28) 이성상 제주목사가 제주도내 각 고을을 순력한 내용을 그린 화첩인 '탐라순력도(보물)'를 테마로 한 역사 체험공간입니다.

 

탐라순력도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인 18세기 초, 제주도의 지리, 지형, 풍물 및 관아, 성곽, 방어, 경관 등의 자세히고 사실적인 시각적 정보를 담아내고 있답니다.

 

망경루에 올라가 봤습니다.

 

지금은 고층건물이 생겨 제주도 바다를 조망할 순 없지만, 과거엔 보였다고 하니 제주 앞바다를 상상으로 그려봅니다.

 

제주목관아 풍경

 

연희각과 홍화각 뒷모습

 

제주목관아 비석군

제주목관아 내에 소재했던 비석과 도내 각지에 산재해 있던 망실 위기에 처한 비석들을 한 곳으로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과거 제주시청사 및 공신정 주춧돌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관덕정 서쪽에 위치한 구. 제주시청사 부지를 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주춧돌들입니다.

조선시대에 제주시청사 부지에는 사창, 진휼창 등 주로 창고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면사무소지, 해방 이후 제주시청이 자리한 곳입니다.

 

제주목 과원

18세기 이전에 제주성 안에 동서남북과 중과원 등 5개와 별과원 등 6개의 과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과원에 있던 감귤의 종류들이 심어져 있어 이를 재현한 과수원입니다.

 

귤 종류인 감자와 지각

  

지각과 편귤

 

청귤과 홍귤

 

사두감과 유자

 

병굴과 산귤

 

돌하르방(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2-19, 20호)

제주읍성 남문 밖에 있던 것을 제주목관아 내부 야외전시장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제주 동자석

제주 동자석은 조선 초기부터 1900년 전후까지 지속된 제주 장묘문화의 하나로 무덤 좌우에 세웠던 석물입니다.

육지에 있는 망주석 역할인 듯하네요.

 

제주목관아는 겨울이어도 관아 내부 풍경이 무척 아름답더군요.

원래의 전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정말 운치있고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주 역사의 중심, 제주 지리적 중심지이기도 한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를 구경하고 보니 제주도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제주도에 대한 이해를 하고 관광을 하면 더욱 유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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