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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여행

사육신공원과 사육신묘, 사육신과 생육신 이야기

by 휴식같은 친구 2023.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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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공원과 사육신묘, 사육신과 생육신 이야기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지만, 가끔씩 돌아오는 꽃샘추위는 여전히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지난 일요일엔 포근하던 날씨가 바람이 조금 불고 쌀쌀해지더군요.

 

미세먼지가 많은 계절이지만, 날씨가 쌀쌀해지고 바람이 불면서 대기질은 상대적으로 깨끗해져서 산책을 나섰습니다.

당산역에서 출발해 양화한강공원, 여의도한강공원을 지나 한강대교까지 걸었습니다.

 

양화한강공원에서 여의도한강공원 산책

 

그리고 한강대교에서 노량진 방향으로 들어가 사육신묘가 있는 사육신공원에 잠시 들렀는데, 3년 만에 다시 찾았네요.

사육신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기를 들며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7명의 충신을 모신 곳입니다.

 

여의도 불꽃축제가 열릴 때 조망명소로도 많이 알려진 사육신공원과 사육신묘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육신공원은 9호선 노들역과 1호선 노량진역 사이에 있으며,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홍살문은 2개의 붉은 기둥으로 세워진 문이 없는 문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가정의 안녕과 무병을 기원하는 의미로 서원이나 향교, 왕릉 등에 세워지던 것입니다.

 

 

사육신역사공원 & 사육신묘 관람안내

 

관람시간 제한없음

(의절사와 사육신묘는  동절기 09:00~17:00, 하절기 09:00~17:30)

휴무일 연중무휴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5대 무료(협소하여 주차하기 어려움)

(입구 노량진 119안전센터 앞에 주차장 있으나 장애인차량에 한함, 한강대교 남단 공영주차장이나 노량진수산시장 유료주차장 이용)) 

소요시간 30분 이내

 

사육신공원 안내도

 

사육신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홍살문이 있고, 의절사 입구인 불이문으로 들어가서 의절사와 사육신묘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의절사에서 나오면 사육신 역사관이 있고 뒤로 돌아가면 여의도불꽃축제 조망명소인 사육신공원 조망명소가 있습니다.

 

먼저, 의절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불이문으로 의절사와 불이문 모두 1978년 사육신 묘역의 정화사업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고, 2년 후 단종을 상왕으로 물러나게 한 후 왕좌를 차지합니다.

이때부터 사육신 등은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는 활동이 시작되나, 결국 실패하고 이때 70여명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사육신이중 하위지, 성삼문, 류성원, 이개, 유응부, 박팽년 등 여섯 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육신묘에는 6명이 아닌 7명의 묘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생육신 중 한 명인 남효온이 6명의 일대기를 기록하면서 이들을 사육신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훗날 정조는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로 공인하면서 사육신 외에 육종영(6명의 왕족 :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의화대군), 삼상신(3명의 제상 :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사의척(4명의 외척 : 송현수, 권자신, 정종, 권안), 삼중신(3명의 중신 :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김문기) 등 다양한 충신들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영주여행] 단종복위운동으로 순절한 '금성대군 신단'

 

사육신묘에 여섯 개의 묘가 아닌 일곱 개의 묘가 있는 이유는 사육신묘와 함께 삼중신에 속해 있던 김문기가 묻혀 있는 것입니다.

사육신묘를 정비할 당시인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기존 사육신에 김문기를 추가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사육신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로 생육신이 있습니다.

생육신은 세조를 몰아내려고는 하지 않아 죽지 않고 살았으나 평생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들을 말합니다.

김시습, 남효온, 원호, 조려, 성담수, 이맹전 등을 생육신이라 부르며, 이들은 사육신의 충절을 따라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둔하며 지냈던 지식인들입니다.

 

불이문을 지나면 의절사가 있습니다.

7명의 사육신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입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7년(1681)에 민절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후기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 의해 민절사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6각의 육신묘비가 세워졌습니다.

 

정조 6년(1782)에 세워진 신도비(좌)와  1955년에 세워진 육각의 사육신비(우)

각 면에 사육신 한명 한명의 이름과 그들이 쓴 글, 시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삼문, 이개, 하위지, 김문기, 박중림, 성승, 유응부, 박쟁, 권자신, 윤영손, 송석동, 이휘, 석을중, 아기지, 불덕은 작형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고, 박팽년은 고문 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하며,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되는데,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사육신의 가문들은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으로 죽고, 모친과 딸, 조손, 형제자매들은 변방의 노비로 전락했으며, 시집간 딸들만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살아남은 조카 중 한 명인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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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팽년의 시조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성삼문의 시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의절사 내에는 하위지, 성삼문, 류성원, 이개, 유응부, 박팽년, 김문기 7명의 사육신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의절사 뒤쪽에는 이분들의 묘가 있는데, 원래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다가 그 후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습니다.

 매년 10월 9일에 추모제향을 올린다고 합니다.

 

의절사 풍경

 

의절사 우측으로 들어가면 사육신묘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사육신묘 앞에 세워진 작은 비석

 

우측에는 사육신묘 7개 중 4기의 묘가 있습니다.

 

김문기(미상~1456(세조 2)) - 좌

본관은 김녕, 자는 여공, 호는 백촌, 시호는 충의

문무겸전하며 함경도 병마절제사와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를 지냈습니다.

 

 

박팽년(1417년(태종 17)~1456(세조 2)) - 우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시호는 충정

경술과 문장, 필법이 뒤아나 집대성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유응부(미상~1456(세조 2)) - 좌

본관은 기계, 자는 신지, 호는 벽량, 시호는 충목

무과에 급제하여 무신으로 관직을 시작했고 첨지중추원사, 평안도절제사를 지냈습니다.

 

 

이개(1417년(태종 17)~1456(세조 2)) - 우

본관은 한산, 자는 청보, 호는 백옥헌, 시호는 충간

1758년(영조 2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운서원 등에 제향되어 있습니다.

 

좌측에는 사육신묘 7개 중 3기의 묘가 있습니다.

 

유성원(미상~1456(세조 2)) - 좌

본관은 문화, 자는 태초, 호는 낭간, 시호는 충경

1691년(숙종 17)에 와서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시켰고,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성삼문(1418년(태종 18)~1456(세조 2)) - 중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문

문집에 성근보집이 있습니다.

 

하위지(1412년(태종 12)~1456(세조 2))

본관은 진주, 자는 천장, 호는 단계/연풍, 시호는 충렬

문집현전 직전에 등용되어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의 교정과 역대병요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의절사에서 나와 위로 올라가면 사육신 기념관이 있는데 문은 닫혀 있습니다.

사육신 역사관은 사육신에 대한 전시물과 영상물을 만나 볼 수 있고, 노량진 수험생들을 위한 무료 공부방도 운영하고 있답니다.

 

기념관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전망대가 있습니다.

 

전망대 앞 공원

 

사육신공원 조망지점

여의도 불꽃축제할 때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한강철교

 

남산서울타워도 선명하게 보이는 맑은 날씨입니다.

 

이곳은 6.25 전쟁 직후 7사단이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잇는 노량진 일대에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던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였습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의 한강이남을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 교량을 폭파했고 6월 30일과 7월 1일에 노량진 수원지, 사육신묘, 수산시장 등 이곳 일대에서 백병전과 공방전을 펼쳤다고 합니다.

 

여의도한강공원과 63빌딩

 

사육신공원 야생화정원 내려가는 길

 

야생화정원에서 바라본 한강철도

 

북한산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갤럭시 S23을 구입하고 처음 찍어 봤는데, 고배율로 찍어도 이렇게 선명하게 나오네요.

 

노량진 수산시장

 

사육신공원 뒤쪽으로 나오면 밖에서 사육신묘를 볼 수 있습니다.

 

후문으로 나오면 래미안트윈파크 아파트가 보입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노들나루공원과 이어집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로부터 다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의인들.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목숨까지 앗아갈 줄 알면서 충절을 지켜낸 의인들의 기개는 당연 찬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산택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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