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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북부.인천시 여행

조선시대 중국사신이 머물던 여관터, 고양 벽제관지를 아시나요?

by 휴식같은 친구 202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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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엔 고양시 고양동에 있는 벽제관지를 보기 위해 드라이브했습니다.

 

벽제관지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객사가 위치했던 곳인데요.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이 한양에 도착하기 하루 전, 휴식을 취하며 머물고 다음날 조선 왕을 접견하기 위해 예의를 갖추던 여관이 있었던 곳입니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단 역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고, 왕이 제릉(태조의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으로 개성 판문군 지동에 있음)에 제사를 지낼 때 숙소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지금은 건물을 받치던 돌의 일부만 남아있어 옛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한중 외교사의 역사적인 의미를 인정받아 1965년 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습니다.

 

벽제관지 일대 모습

오래된 향나무 한 그루가 조선과 중국의 역사적인 외교를 증언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벽제관푸른 말발굽의 객사란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벽제동이라는 지명 역시 벽제관으로 인해서 비롯된 것인가 봅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를 비롯해 의주로, 연행로에는 벽제관과 같은 역관(여관)이 10여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사적 144호로 지정된 벽제관지

 

원래 벽제관은 성종 7년(1476) 3km 떨어진 곳에 지어졌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당시의 고양군청이 훼손되면서 인조 3년(1625)에 이곳으로 함께 옮겨졌다고 합니다.

벽제관지의 면적은 1,265평, 건물은 3동 601평에 달했습니다.

 

벽제관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크게 훼손시켰고, 2대 총독이었던 하세가와는 벽제관의 부속건물인 육각정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남아있던 건물과 담장이 소실되었고, 1960년대까지 삼문마저 허물어지면서 벽제관의 실체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건물의 기둥을 받치던 돌의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당시 벽제관에는 정청을 중심으로 서익현과 동익현이 있었고, 입구에는 삼문이 있었습니다.

안내문에 벽제관지 복원조감도가 있는 걸 보니 조만간에 벽제관이 복원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조선시대 중국과의 외교적 의전과 숙박을 위한 여관터

 

목적이 불분명한 주춧돌 몇 개가 남아 있습니다.

 

벽제관 건물 3동이 있었던 주춧돌만 남아 있습니다.

 

동쪽 위에서 바라본 벽제관지

 

벽제관지는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조선과 중국의 외교적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장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울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한다네요.

 

북방으로 혜음령과 동북방으로 있는 퇴패치(됫박고개), 그리고 서남으로 퍼져가는 도로를 이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 장군과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 싸움의 전쟁의 중심지였던 곳입니다.

이여송 군이 혜음령에서 대패한 많은 뒷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경기역사문화유산원 인용)

 

벽제관지를 방문한 후, 가까운 고양근린공원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작지만, 겨울 눈을 밟으며 산책하기 좋더군요.

날씨가 맑은 날에는 북한산의 절경도 감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양근린공원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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