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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장군의 행주서원(지)

by 휴식같은 친구 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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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의 명장, 권율 장군의 행주서원(지)

 

 

행주산성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일 것입니다.

 

행주대첩은 알다시피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의 불퇴전의 지휘로 2,300여 명의 정예병과 승병, 의병, 부녀자 등 3천여 명이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곳으로 부녀자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싸움으로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유명해진 전쟁입니다.

임진왜란의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첩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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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 아래쪽, 행주산성역사공원에 행주대첩의 주약인 권율장군을 모시는 행주서원이 있어서 잠시 사진을 담았습니다.

 

행주서원은 헌종 8년(1842)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적들과 싸워 큰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을 모신 곳입니다,

행주서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기공사라 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점차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행주서원의 현판은 고종 때의 무신으로 글씨와 문장이 뛰어난 신헌이 썼다고 합니다.

 

 

권율장군은 선조 15년(1582) 문과에 급제(당시 45세)하고, 임진왜란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습니다.

선조 32년 전라도 병사를 인솔하여 행주산성에 주둔하던 중 3만 명의 왜국과 싸워 2만 4천명을 사살하는 행주대첩 전과를 올린 공로로 대원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행주대첩에 전라도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전라도 관찰사로 병사를 인솔해 올라온 이유라고 합니다. 

 

권율장군은 왜군이 철수한 선조 37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후 선무공신 1등에 영의정의 벼슬을 받았고, 시호를 충장공이라 하였습니다.

 

행주서원 현판이 걸려있는 행주서원 행랑채

 

행주서원은 문을 열고 있지 않아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옆으로 돌아가니 담장 너머로 내부 건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랑채로 들어서면 나오는 건물은 강당입니다.

사당을 지은 이후, 이곳에서 후학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입니다.

 

행랑채와 강당 사이엔 관리사와 그 뒤쪽에 협문이 있습니다.

 

강당 뒤쪽으로 가면 내삼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이 행주서원 가장 위쪽에 자리한 권율장군을 모시는 사당, 충장사입니다.

 

사당 옆으로 비석이 세워져 있네요.

행주대첩비로 보이는데,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으로 1970년 행주산성 내에 새로 지은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 옆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담장에서 바라본 오후의 하늘 풍경이 너무 멋집니다.

 

조선역사 500년 동안 가장 큰 전란이었던 임진왜란

임진왜란의 3대첩인 진주대첩의 김시민, 한산도대첩의 이순신, 행주대첩의 권율장군이 있어서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55세에 국가의 운명에 거대한 영향을 준 전란에서 출중한 전공을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찬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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