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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고양여행] 최영장군묘,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

by 휴식같은 친구 2021.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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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여행] 최영장군묘,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

 

 

"황금보기를 돌 같이하라!"

독도는 우리땅에 나오는 가사 내용이기도 하고, 고려 충신인 최영 장군의 말씀입니다.

 

파주 삼릉으로 가던 길에 최영장군묘 입간판이 있어서 파주삼릉을 관람하고 일부러 들렀습니다.

 

파주 삼릉(공릉, 순릉, 영릉), 한명회의 권세를 느끼다

 

아시다시피 최영 장군은 고려 말기의 충신으로 이성계 일파의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고려 왕조의 운명과 함께 했던 명장이었습니다.

 

최영장군묘를 둘러보면서 그의 충절과 고려 역사에서의 크나 큰 업적을 정리해 봤습니다.

 

최영장군묘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표지석,

최영 장군의 유명한 말씀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장군묘 관람안내

 

입장료 무료

관람시간 상시 개방

(산속에 있어서 낮에 방문 권유)

주차장 무료

 

최영장군묘가 있는 대자산 숲길은 고양의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합니다.

1919년 3월 26일, 고양군 벽제면 대자리의 주민들은 대자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검거되어 모두 징역을 선고받은 곳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에서 600여 미터 산길을 올라야 최영장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측에는 경안군묘와 임창군묘가 있습니다.

 

 

대자산 숲길은 대자동 최영장군 묘소 입구에서 고양향교까지 연결된 산속, 숲길입니다.

총거리는 2.5km로 오솔길, 평지길, 산길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소현세자의 자손, 경안군묘와 임창군묘

 

대자산 숲길은 고양누리길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근처에 필리핀 참전비, 최영장군 묘, 중남미 문화원, 고양향교, 벽제관지 등이 있어서 걸을만하겠습니다.

 

산속에 있는 묘소라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끔씩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있더군요.

아무래도 최영 장군은 역사적인 중요인물이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란 생각이 듭니다.

 

10도를 웃도는 포근한 겨울 날씨인데, 이전 강추위에 얼어붙었던 계곡의 얼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산이라 역시 추운가 보네요.

 

산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니 전방에 최영장군묘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낮에 가야지 어스름하거나 밤에 가면 너무 무서울 것 같습니다.ㅎㅎ

 

최영장군묘 입구입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묘소가 있네요.

 

최영장군묘 앞에서 대자산 숲길이 이어지는데, 1.2km를 가면 고양향교와 중남미문화원에 다다릅니다.

 

[고양여행] 고양향교 & 중남미 문화원

 

이곳이 최영장군과 최영장군의 아버지가 묻혀 있는 묘입니다.

 

최영 장군(1316~1388)은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한 고려 충신입니다.

 

 

최영은 동주 최씨로 철원(충남 서산 출신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 1년(1352)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 회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명장이기도 하죠.

특히 공민왕 5년에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되찾기도 했습니다.

 

고려 우왕 14년(1388)에 명나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여 팔도통도사(문화시중)로서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좌군과 우군통도사에 조민수와 이성계를 두고 3월에 개성을 출발해 평양에 도착하나, 우왕의 만류로 평양에서 출정하지 못하고 왕과 함께 개성으로 돌아옵니다.

 

대신 조민수와 이성계는 요동을 출정케 했는데, 이성계는 조민수를 꾀어 요동 진군을 포기하고 5월에 개경으로 역진격(위화도 회군)하게 됩니다.

촤영장군은 6월에 남은 군사로 대적했으나 역부족, 곧바로 체포되어 고양으로 귀양을 가서 같은 달 합포로 갔다가 7월에 충주, 다시 12월에 개경으로 옮겨져 참수를 당합니다.

당시 나이 73세, 그의 아버지가 묻혀있는 고양의 이곳 최원직의 묘소 앞에 안장되었습니다.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중국의 원과 명 교체기에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왕실을 지키려 한 명장,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없었고 요동을 정벌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최영 장군은 임경업 장군 및 남이 장군과 함께 한국의 주요 장군신으로 모셔지지만,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가장 널리, 가장 열렬히 숭앙되고 있습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그이 죽음을 슬퍼하며 고양지역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의 숭배 대상으로 섬겨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는데요.

현재 경기도 고양에 있는 최영장군의 무덤에는 내내 풀이 자라지 않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최영 장군의 아버지 최원직의 묘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죠.

원래 이 말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경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인데요.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새겼다고 합니다.

 

 

최영의 활동 범위는 전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최영 장군 관련 사당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습니다.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 강원도 철원군과 홍성군의 최영 장군 생가, 홍성문화제의 최영 장군 영신제,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기슭의 최영장군묘, 경남 통영시의 최영장군사당, 제주도 추자면의 최영장군사당, 부산 수영구의 무민사, 부산 동구의 무민공 최영장군사당, 경남 남해시 미조면의 최영장군사당 무민사, 충북 충주시의 기봉영당,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최영장군당 등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대한민국 역사의 가장 위대한 장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최영장군묘가 있는 주위는 지금도 깊은 산속일 만큼 주위엔 온통 나무와 숲만이 있을 뿐입니다.

 

최영 장군은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외적을 막고 고려왕실을 보호하며 청렴하기까지 했던 최영은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죠.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나서 존경하는 선배 무장이었고 싸움터에서는 전우이며 그를 장군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과 다름없는 최영을 결국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오랜 역사가 흘러갔지만, 최영 장군의 나라사랑과 충절은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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