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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우리나라 이민사를 한눈에,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3.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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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민사를 한눈에,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월미도 이튿날, 월미공원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을 찾았습니다.

 

한국의 이민역사는 120여 년 전인 1902년에 개항장인 인천, 제물포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00여 명이 하와이로 출발한 것이 시초인데요.

2003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이민사를 재조명하고 선조들의 개척자적 삶과 발자취를 전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입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1905년에 발급된 여권을 비롯해 초기 이민자들과 관련된 자료, 한국의 이민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꾸며놓았는데요.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내용을 담았습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월미산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이민의 발자취와 관련한 다양한 전시물이 갖춰져 있는데, 당시 하와이 이민자들을 모집했던 광고를 비롯해 64회에 걸쳐 이루어진 7천여 명의 하와이 이민자 명단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최초의 이민자들이 타고 갔던 선박인 갤릭호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사용하였던 물통과 도시락, 신분확인용으로 걸고 다녔던 번호표 등이 전시되어 당시 이민자들의 고달픈 삶을 보여줍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앞을 지나가는 월미바다열차

 

그동안 애물단지였다가 다시 리모델링해 운영을 시작했고, 코로나가 끝난 지금엔 하루 이용자수가 2000명을 넘어서면서 만성 적자에서 탈출하고 있으며, 이젠 월미도의 랜드마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월미도 여행] 월미바다열차 요금 및 노선, 예약

 

한국이민사박물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18:00(30분 전 입장마감)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공휴일이면 다음날 휴무), 1월 1일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무료

 

한국이민사박물관은 4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수장고, 영상실, 강당, 자료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외동포들로부터 기증받거나 구입한 유물 44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기획전시실은 이민 관련 유물과 문화예술품을 기획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며, 영상실에서는 이민기록영화 등의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습니다.

 

제1전시실에는 이민자의 발자취, 도전의 출발지였던 인천, 제물포항의 1902년, 최초의 이민 등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1860~1909년에는 구한말 농민과 노동자들이 가뭄과 굶주림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로 이주했습니다.

본격적인 이민은 1902년부터 1905년까지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7,400여 명이 이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의 이민역사

 

해상교류의 중심지, 인천

 

인천은 백제시대 능허대 아래 한나루를 통해 중국과 교류를 했고(372~475년),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거점이 남양만이었지만 인천에는 혈구진 등 군진이 설치되어 외침의 방어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시대엔 강화, 교동, 자연도 등이 대외교통의 거점으로 정비되었고, 송나라 사신의 객관이었던 자연도(영종도)의 경원정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공자와 그 제자의 화상을 원나라에서 들여와 교동향교에 봉안했던 것은 당시 교류의 흔적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바다를 통한 외국선박의 출입이 금지된 해금정책을 실시하였고, 1600년을 전후로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가 왕실의 보장처(왕실과 조정이 피난하면서 전란을 극복하는 곳)로 선택되고 인천 해안지역의 군사 방어시설이 보강되었습니다.

19세기 중엽 서양 열강들의 통상요구를 저지하고 차단하기 위한 최전방 방어시설의 기능을 하다가 결국 중국과 일본에 이어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국제 개항장으로 등장했습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제1 전시실 모습

 

국제무역항으로의 발전

 

인천은 개항 이후 조선 최대 무역항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전국 무역량의 절반을 차지했는데요.

일본 및 청국 상인의 활동과 외국 상사를 중심으로 곡물을 수출하고 공산품, 직물, 면제품을 주로 수입했습니다.

 

19세기말 우리나라는 가뭄으로 굶주림이 계속된 데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의 하와이는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되며 원주민들이 일에 종사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력을 받아들였고, 1882년 중국 배척법이 통과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지 못해 조선인 노동자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알렌 선교사는 1884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발탁되어 신망을 얻었고, 양국 정부 간의 핵심적인 중재자로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897년 오하이오 주지사였던 친구 내쉬의 추천으로 알렌이 미국 공사로 임명됐고, 알렌의 추천을 받은 데쉴러가 고종으로부터 하와이 이민사업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근대의 외무부, 유민원

고종황제의 승인 직후 여권발급을 하는 공식 기관으로 유민원이 설치되었습니다.

 

최초의 해외계약이민과 집조(여권) 발급

 

하와이행 첫 이민자들은 유민원 총재가 발급한 여권(집조)을 갖고 떠났는데요,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 송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여러가지 여권

 

하와이 이민모집 공고

(1903년 8월 6일 자)

 

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장 모습

 

1902년 첫 하와이 공식 이민 경로

 

12월 22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121명 현해환 승선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항 102면 갤릭호 승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 도착

 

갤릭호 승선자 102명

 

121명이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했으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19명이 탈락해 102명만이 갤릭호에 승선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 도착해서는 질병자 16명이 발견되어 탈락하고 결국 최종 86명이 상륙허가를 받았습니다.

 

현해환 출항

1902년 12월 22일 월요일,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은 일본 제물포항에서 일본우선회사 현해환에 승선하여 2일간 항해에 올랐습니다.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하와이 호놀룰루항으로 가기 위해 바꿔 탄 갤릭호

 

하와이 이민 1세대 함해나(본명 최해나) 할머니

 

함해나(1880~1979)와 함호용(1868~1954) 부부는 1905년 몽골리아호를 타고 하와이 이민을 떠난 이민 1세대라고 합니다.

독립운동에 힘썼고 한인사회의 발전에 평생 헌신했네요.

 

제2전시실에는 하와이 출항, 낯선 환경에서 낯선 생활의 이민자들, 사진결혼, 공동체 형성, 독립에 대한 염원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하와이 이민은 총 64회에 걸쳐 7,415명(1903~1905)이 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와이 65개 농장에서 5,000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혼합농장에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생활했는데요.

뜨거운 햇빛 아래서 힘든 노동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기상, 아침식사 후 6시부터 일을 시작해 30분간의 점심시간이 끝나면 오후 4시 30분까지 하루 10시간 동안 일을 했습니다.

당시 남자는 17달러의 월급을, 여자나 소년은 하루 50센트를 받았다네요.

 

에네켄 농장의 수레

 

하와이에서의 정착생활

 

농장에는 가족과 독신자를 위한 두 종류의 숙소가 있었는데요.

결혼한 부부에게는 작은 정원이 있는 통나무집, 독신은 긴 기숙사식 건물에 서너 명씩 살았습니다.

 

사진신부

 

당시 하와이 노동자들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10배나 더 많았는데, 혼기를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700여명의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로 건너가 사진만 보고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하와이의 교회는 한인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였습니다.

1903년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인 한인감리교선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됐고, 1905년에 호놀룰루를 비롯한 하와이 곳곳에 교회와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1918녕=ㄴ 이승만은 감리교회에서 독립하여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고, 교회들은 친목도모, 민족교육, 한글교육, 문화교육 등을 하며 독립자금 모금활동도 펼쳤습니다.

 

1920년 기준 미국 주별 한인 인구수

하와이에 4,739명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본토엔 1,000여 명 밖에 없었네요.

 

한인들의 새로운 문화와의 융합, 여성들의 사회활동, 다양한 경제활동, 한인들의 문화활동에 대한 내용

 

미주 한인사회의 뜨거운 교육열

그리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제3전시실에는 미국, 멕시코, 쿠바 등 각국의 한인사와 해외입양 등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초기 한인이민사

 

공식 이민의 시작인 1902년 이전, 구한말 불안한 정세와 계속되는 가뭄으로 한인들은 국경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인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본격화되었고,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일본은 70만명이 넘는 한인들을 강제동원해 일본뿐만 아니아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3전시실 모습

 

멕시코와 쿠바 한인사

 

러시아와 사할린  한인 이민사

 

중국과 일본의 한인 이민사

 

중남미 한인 이민사

 

파독 조선기술자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

 

파독 간호사 복장

 

해외 입양의 역사

 

20만여 명에 달하는 해외입양 한인은 우리나라의 해외 입양은 1950년대 전쟁고아와 혼혈아동 문제로 시작됐습니다. 

1953년 정전 이후 10만여 명에 달하는 전쟁고아들은 후원과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해외입양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980년대에는 해외 입양인수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고, 현재는 1985년 수치의 5% 내외로 감소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기관인 해성보육원은 인천에 있으며, 이곳에 혼혈 아동들이 자랐다고 합니다.

 

 

제4전시실에는 150여 나라에 진출한 700만 해외동포의 현황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귀향

미국국립 문서기록관리청의 보관문서에 있는 승객명단으로 1903년 1월 13일부터 1905년 8월 8일까지 총 64회에 걸쳐 7,400여 명이 태평양을 건너갔습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4전시실 모습

 

하와이와 대한민국 그리고 인천

 

2020년 기준 각 국가의 재외 한인 수

중국 235만, 일본 82만명, 우즈베키스탄 17만명, 카자흐스탄 10만여 명 등입니다.

 

캐나다 23만명, 미국 263만명 등

 

러시아 17만여명

 

인천은 1950년대 하와이와 자매결연하면서 하와이 동포들이 기금을 지원해 인하공대(현 전문대)를 설립하고 이후 인하대학교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인하의 인은 인천, 하는 하와이를 일컫는 말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됐습니다.

 

인하대 설립에는 종잣돈 15만 달러가 투입됐습니다.

 

인천의 이민기념사업

 

2017년 기준 재외동포는 740만여 명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은 2016년 기준 176만여 명

 

한국이민사박물관 이민역사 스탬프 투어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색다른 박물관으로 국내에 이민 관련 박물관으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민사는 못살고 힘든 시기부터 시작해 이젠 당당한 대한국인으로서의 지위를 얻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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