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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김포 장릉(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by 휴식같은 친구 2019.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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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가볼만한 곳, 김포 장릉(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조선왕릉 탐방으로 이번에 다녀온 조선왕릉김포 장릉 입니다.

김포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며, 실제 왕이 아니라 아들이 왕이 된 후 사후에 추존된 왕의 능입니다.

 

조선왕릉은 아시다시피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김포 장릉은 기존의 조선왕릉과 차이나는 부분이 있는데요.

바로 조선왕릉 중에서 최초로 묘에서 원으로, 원에서 능으로 승격된 왕릉이기도 합니다.

 

원종과 인헌왕후의 쌍릉인 김포 장릉, 김포 가볼만한 곳에서 산책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만한 곳인 듯합니다.

 

김포 장릉은 김포시 풍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어머니인 인헌왕후의 묘입니다.

 

 

원종(1580~1619)은 14대 임금인 선조와 인빈 김씨의 세 번째 아들(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로 정원대원군이었고, 그의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사후에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에는 왕(원종)으로까지 추존되었습니다.

 

인헌왕후(1578~1626)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90년(선조 23)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지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연주군부부인, 사후에는 인헌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김포 장릉 안내도

 

왕릉은 원종과 인헌왕후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장릉을 관람하고 연지와 저수지 방향으로 산책하면 좋습니다.

 

김포 장릉 관람안내

 

입장료 성인 1,000원 

관람시간 2~5월, 9~10월 06:00 ~ 18:00, 6~8월 06:00 ~ 18:30, 11~1월 06:30 ~ 17:30

(1시간 전 입장마감)

휴무일 매주 월요일

주차장 무료

 

매표소를 지나면 장릉 역사문화관이 있습니다.

조선왕릉과 김포 장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관이네요.

 

조선왕릉 연표

 

조선왕릉 개수는 총 119기에 이르는데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왕과 왕비의 능은 남한에 40기, 북한에 2기가 있는데요.

북한에 있는 두 개의 능은 '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묘인 제릉'과 '정종과 정인왕후의 묘인 후릉'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는 40기의 능이 있는데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있는 상태입니다.

 

조선왕릉과 조선왕 계보(조선왕 순서) 알아보기

 

조선왕릉 종류와 형태

단릉, 쌍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합장릉, 삼연릉 등이 있습니다.

 

조선왕릉 분포 및 구성 그리고 관람안내

 

원종과 인헌왕후의 생애

 

원종(정원군)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619년에 세상을 뜨고, 양주 곡촌리(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그의 아들 능양군이 임금(인조)에 오르자 사후에 정원군으로 추존되고 1626년에 묘를 원으로 높여 흥경원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1632년에는 원종으로 추존되고 원을 능으로 높여 장릉이라 부르게 합니다.

 

 

인헌왕후는 구사맹의 다섯 번째 딸로 1590년에 연주군부인에 봉해졌고, 1623년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 연주부부인이 됩니다.

1626년 세상을 떠나 김포에 원을 조성해 원의 이름을 육경원이라 하였습니다.

 

1627년 홍경원이 김포로 옮겨지면서 원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하였고, 1632년 인헌왕후로 추존되면서 장릉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능, 원, 묘의 차이점은?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고, 원은 세자와 세자비, 후궁의 무덤, 묘는 그 외 왕족의 무덤을 의미합니다.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손자로 계승하여야 하고, 선조와 인조 사이가 비어 있으면 안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이에 인조와 반정공신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는데 당시에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재위 10년 만인 1632년에 원종대왕으로 추존하고, 자신의 왕통을 선조-원종-인조의 순으로 하여 정통성을 다졌다고 합니다.

 

인조반정 : 1623년(광해군 15)에 서인들이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

  

김포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

 

162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인조는 가장 좋은 지역에 안장하고 싶은 곳을 찾다가 현재의 장릉을 택했다고 합니다.

실제 아침 해가 뜨면서 질 때까지 양지바른 곳이며, 겨울에는 눈이 와도 금세 녹는 천혜의 명당자리라고 합니다.

 

당시 육경원이라 하였다가, 아버지인 원종이 이장하면서 흥경원,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릉이라 명하게 되었습니다.

 

관람로와 산책로

30~40분 정도 소요되는데 쉬엄쉬엄 산책하기에 좋게 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을 지나면 조금 걸어가야 합니다.

소나무 숲이 정겹습니다.

 

재실 모습

 

평상시에는 영(종5품) 또는 참봉(종9품) 등이 능역의 관리를 위해 근무하는 곳이고,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죠.

 

김포 장릉에서는 입구에 연지가 있는데요.

대부분의 왕릉에서는 이런 연지가 사라져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는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왕릉에는 왕릉 홍살문 앞에 대부분 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2015년도에 구리 동구릉 내 숭릉 연지가 발굴 조사되기도 했답니다.

 

이곳이 김포 장릉입니다.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

그리고 향과 측문을 들고가는 향로와 임금이 다니는 어로가 있습니다.

 

수복방을 지나 있는 김포 장릉 정자각

제향을 모시는 건물로 왕릉을 항상 위로 올려다보게 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존경과 위엄을 느끼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좌측이 원종, 우측이 인헌왕후의 능입니다.

 

이곳은 다른 조선왕릉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찾으셨나요?

 

 

보통 조선왕릉 아래에는 왕릉이 잘 보이지 않게 봉긋 솟은 사초지가 있는데, 김포 장릉에는 그 사초지가 없습니다.

이유는 원래 원(육경원-흥경원)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데요.

(조선시대 최초로 원이 능으로 승격된 사례)

 

나중에 능으로 승격되어 새로 사초지를 조성하는데, 인력과 비용 부분에 대한 부담으로 신하들이 반대를 해서 사초지는 포기하고, 왕릉에 있는 무인석과 문인석, 석마 등은 기존보다 더 크고 위엄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른 조선왕릉과 비교해 보세요.

 

고양 서오릉에 있는 영릉으로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입니다.

보다시피 조선왕릉은 왕릉 앞에 사초지가 높게 만들어져 있어서 왕릉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경릉,수릉)

 고양 가볼만한곳, 서오릉(경릉, 창릉, 익릉, 명릉, 홍릉) 산책하기 좋네요


혼들이 나와 쉰다는 혼유석

혼이 나들이 갔다가 찾기 쉬우라고 만들어 놓은 등대같은 망주석

불을 밝히는 장명등(불교영향)

문인의 신하인 문석인

무인의 신하인 무석인

왕이 타는 말인 석마

 

이런 것들은 어느 왕릉보다 위엄있게 설치하라는 어명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뚜렷이 두 개의 쌍릉이 잘 보여서 관람하기에는 좋은데, 인조는 부모님 묘를 제대로 대우하고 싶었지만 대신들의 의견을 꺾을 수는 없어서 아쉬워했을 것 같습니다.

 

정자각 옆에는 비각이 있는데, 다른 왕릉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우측에 놓여 있습니다.

 

비각에 있는 것은 왕릉에 있는 비석이고, 옆에 있는 것은 이곳에 육경원으로 조성할 당시에 세워졌던 비석 받침돌입니다.

2007년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땅에 묻어 있던 것이 지상에 노출되어 발견된 것인데요.

 

원에서 능으로 바뀌면서 이 비석이 필요 없어지면서 땅 속에 묻었으리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육경원 당시 비석은 근처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비석 받침돌을 통해서 인조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각별한 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육경원의 비석이 왕릉의 비석보다 크고 화려하게 조각을 했답니다.

 

1) 비석 받침돌이 왕릉의 비각 받침돌보다 더 크게 만듦.

 2) 받침돌에 극락왕생을 뜻하는 멋진 문양을 만듦

(비각 받침돌에는 문양이 없음)

 

비석 받침돌의 화려한 문양들

그리고, 우측 끝 지점은 상당히 깨끗하죠?

 

이는 흙 위로 노출된 부분을 말하며, 전체적으로 300년이 넘은 것에 비하면 상당히 깨끗합니다.

김포 장릉의 땅이 그만큼 물이 잘 빠지고, 땅이 좋다는 걸 반증한다고 하네요.

 

정자각에서 바라본 쌍릉 모습

 

장릉을 관람하고 산책길을 따라 저수지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장릉 숲에서 자연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장릉 아래 있는 저수지 모습

 

다시 산길을 따라 나왔습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지만 항상 왕위를 위협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자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 호탕하고 무예가 뛰어난 평을 듣고 있던 와중에 왕으로 추대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오자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정원군의 집은 몰수하여 궁궐을 짓습니다.(광해군 7년, 1615)

 

원종(정원군)은 한때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아들이기도 했으나 지켜줄 아버지는 없는 상황, 강화도로 유배된 아들 능창군은 죽고, 나머지 아들을 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의 나날을 보내다 40세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 후 4년 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첫째인 능양군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정원군 집터에 서린 왕의 기운은 바로 능양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는 일은 역사에서 반정의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인조에게 있어서 피 맺힌 한을 푸는 순간이었겠죠?

 

조선왕릉을 통해 배우는 조선시대 역사도 흥미롭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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