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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여행] 고즈넉한 화개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

by 휴식같은 친구 202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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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여행] 고즈넉한 화개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

 

 

강화도 섬 속의 섬, 교동도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사찰 작은 사찰 하나와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가 있는 곳입니다.

 

고려시대 삼은 중 한 명인 목은 이색이 머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하는 화개사,

그리고 고려 후기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 원나라 사진으로 가서 공자와 주자의 상을 가지고 첫 번째 배를 댄 곳이 교동도이며, 이곳에 문묘를 세우고 화상을 봉안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입니다.

 

교동도 화개사와 교동향교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함께 둘러보면 좋은데, 코로나로 교동향교 진입을 막아놓은 상태라 다소 아쉬웠습니다.

 

화개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고려 때 창건된 절이지만, 정확히 언제 창건됐는지는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때 삼은(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중 한 명인 목은 이색이 이 절에 머물며 독서를 즐겼다고 하는데요.

 

 

일제강점기 때 31본산 중 하나인 전등사의 말사로 1915년 붕괴된 적이 있고 1928년에 정운이 불사를 일으켰으나 그 이후 폐사, 화재로 없어졌다가 1968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고려 때 중수된 것으로 보이는 도금 불상 2구가 있으나 지금은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화개사는 사진으로 보듯 아주 작은 사찰이라 관람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개방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화개사에 남아있는 유물은 이 팔각원당형 부도 하나입니다.

화개사의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니 이것 역시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가 없는 상태네요.

 

교동도 화개산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습니다.

교동도에 가장 높은 화개산은 이 등산로를 따라 정상으로 갈 수 있고, 대룡시장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정문이 아닌 측면으로 올라갔습니다.

절 옆에서 자라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고즈넉한 화개사를 더욱 분위기 있게 지켜주고 있는 듯하네요.

 

화개사에 있는 이 소나무는 수령이 200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절이라고 해봐야 이 한옥 건물 하나가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측에 있는 건물은 스님이 주거하는 공간인 듯합니다.

 

절 앞 잔디광장이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네요.

 

화개사 사찰건물 모습

 

화개사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에 석모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즈넉한 아주 작은 사찰, 화개사의 풍경도 예쁜 곳입니다.

 

화개사 가는 길에는 우측에 교동향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개사에서 800여 m 떨어져 있죠.

 

현재 코로나로 인해 교동향교까지는 들어갈 수 없어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멀찍이서 교동향교 모습을 찍었는데, 전방의 산은 교동도 화개산입니다.

 

교동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5)에 창립되었으며, 고려 충렬왕 12년(1289) 안향이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현유로 추앙받는 공자와 주자의 상을 가지고 왔는데 고려에 당도하여 첫 번째로 배를 댄 곳인 교동도에 문묘를 세우고 화상을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향교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점이 인상적이네요.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며 동국 18현인(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김장생, 조헌,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4년 전에 방문했을 때 교동향교 사진을 하나 올려 봅니다.

 

교동향교에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제기고, 주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건 당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고, 1980년에 복원되었습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돌담이 정답고 산 중턱에 자리해 건물마다 고저 차이가 분명한 편입니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 전적을 지급받아 교육을 실시했으나, 후기에는 이런 교육적 기능이 사라졌습니다.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올리는 행사만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교동향교, 어떻게 섬 속의 섬, 그 당시 오지임에 확실한 곳에 향교가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원래의 교동향교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아마 국보 대접을 받았을 겁인데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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