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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옛 지명이 된 공주 고마나루(곰나루, 웅진) 웅진단과 곰사당

by 휴식같은 친구 202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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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옛 지명이 된 공주 고마나루(곰나루) 웅진단과 곰사당

 

 

공주의 옛 지명은 고마나루라고 합니다.

고마는 곰의 옛말이며 한자로 쓰면 웅진이라고 합니다.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인 웅진의 이름이기도 하며, 현재의 공주시의 옛 이름이기도 합니다.

고마나루-곰나루-곰주-공주로 바뀌었다고 하네요.

 

공주의 옛 지명이었던 고마나루는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금강의 나루터곰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곳이며 곰에게 제사를 지내는 고마나루 웅진단과 곰사당이 있습니다.

 

고마나루의 전설과 고마나루 풍경 그리고 웅진단과 곰사당 이야기입니다.

 

공주의 옛 지명인 고마나루는 곰을 뜻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큰 마을임을 의미하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백제 동성왕 때 금강이 넘쳐 200여 호가 물에 잠겼다는 기록이 있고, 당나라가 고마나루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는 기록, 백제가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고마나루로 옮겨 도읍하였다는 기록 등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1945년에 근 장마가 져서 고마나루 일대의 모래가 쓸려 나갔는데, 그 자리에 가로 세로로 샇은 건물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난 적이 있는 걸 보면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은 확실하나 봅니다. 

 

고마나루 일대는 2006년 12월 4일에 ‘명승 제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먼저, 고마나루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해질 무렵 방문한 이유도 있고,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방문하는 시간동안 인적은 전혀 없었습니다.ㅎㅎ

 

고마나루의 곰에 대한 전설입니다.

 

아득한 옛날 지금의 곰나루 근처 연미산에 큰 굴이 있었다.

이 굴에는 커다란 암곰이 한 마리 살았다.

나무하러 나온 사내가 그 암곰에게 납치되어 굴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사내는 곰의 감시로 도망치지 못하고 곰이 사냥해 온 먹이를 함께 먹으며 살았다.

그러다 두 번째 새끼까지 낳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사내를 믿기 시작한 곰이 동굴 입구를 막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는 암곰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탈출했다.

강변 쪽으로 도망가는 사내를 발견한 곰은 두 새끼를 데리고 강변으로 달려가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는 곰의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넜고, 그것을 보고 있던 곰은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내가 건너온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라고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속문학사전 설화 편 참고)

 

5분 정도 걸어가니 공주 웅진단터라는 표지가 있습니다.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 주관으로 금강의 수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장소입니다.

역사서에는 웅진단은 웅진사, 웅진제소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네요.

 

이곳 고마나루 웅진단은 2011년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고려와 조선시대 기와 건물지 1동과 담장시설, 제사에 이용되던 분청사기와 백자제기, 기와, 전돌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공주 웅진단 모습

 

웅진단 제사는 처음엔 곰에 대한 제사였지만, 점차 금강의 수신에 대한 제사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웅진단 제사는 봄과 가을 두 차례 지냈으며, 제사상에는 곰이 좋아하는 도토리묵과 마를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간에서 당굿이나 기우제 형태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이 역시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네요.

 

웅진단에 새겨진 글자는 '웅진수신지처'라고 적혀있습니다.

1998년에 계룡산 산신제 복원과 함께 이곳의 수신제도 복원하면서 조성한 것입니다.

 

웅진단 앞은 금강이 흐르고 있고, 연미산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지금도 연미산 중턱에 전설 속의 곰이 살았다는 굴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고마나루에서 보면 백제가 두 번째 도읍지로 웅진을 선택한 이유가 보입니다.

 

고구려에 패하고 새 도읍지로 여러 지역이 검토되었으나 그중 웅진이 험준한 산지가 주변을 에워싸고 육로를 통한 공격이 쉽지 않았고, 수로인 금강 또한 진입로의 폭이 좁아서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진입하기 어려운 지리적 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제는 적이 어느 쪽에서 공격해도 방어하기 좋은 웅진을 두 번째 수도로 선택했고, 이를 바탕으로 훗날 백제의 중흥기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금강을 통한 해상무역으로 풍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며 또 한 번의 문화강국으로 거듭났습니다.

 

송산리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돤 배경으로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도시계획, 건축기술, 예술, 종교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웅진 백제시대에 고마나루가 금강으 나루터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줍니다.

 

입구에 있는 곰사당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고마나루 솔밭이라고 하는데, 금강 6경에 속해 있습니다.

 

소나무 숲이 멋스럽게 조성되어 있고, 곳곳에 곰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요.

전설 속의 암곰과 세끼들입니다.

 

고마나루에 있는 곰사당

 

고마나루 전설에 담긴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곰사당 앞마당에 있는 몽신단비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습니다.

 

공주 곰사당 모습

조선시대 향교의 대성전을 본떠 소박하게 지어졌고, 야트막한 담장과 아늑한 숲 속이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곰사당 내부에 있는 돌 곰상

 

1972년에 백제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이 웅진동에서 발견되어 공주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돌 곰상은 복제품이라고 합니다,

 

 

돌 곰상의 내력이 정확히 발견된 것은 없지만, 신앙적인 의미가 담긴 소품이거나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든 부장품이라는 의견이 있다고 하네요.

부여에서 흙으로 된 곰상이 발견된 적이 있어 무덤의 부장품(진묘수)이라는 의견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만화로 보는 공주 고마나루

 

공주와 웅진의 옛 지명이 된 고마나루

둘러보는데 20분 정도면 충분하니 잠시 공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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