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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제주 4.3사건을 이해하다, 제주 4.3평화기념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2.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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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을 이해하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제주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건이 있는 게 그건 바로 제주 4.3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제주도민 10%에 해당하는 최대 3만여 명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이번 제주여행에서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곳이 제주 4.3평화공원과 4.3평화기념관이었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 4.3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회복 및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 기념공원입니다.

4.3 희생자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성격으로 2003년 공원조성을 시작했고, 2008년에 4.3평화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위령제단, 위패봉안실, 4.3평화기념관, 행방불명인 표석, 봉안관, 4.3평화교육센터(어린이체험관)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주 4.3사건 추모공간,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평화기념관 4.3의 역사를 담는 그릇 모양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건물에서 4.3의 역사적 진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한 상설전시실과 개가 자료실, 아카이브실 등으로 구성된 전시관입니다.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를 토대로 전시, 연출되어 있으며 4.3의 발발, 전개, 결과, 진상규명운동까지 전 과정이 차례로 펼쳐져 있어 4.3 사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4.3 사건에 대해서 개괄적인 내용만 알고 있던 저에게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는데 큰 역할을 한 곳이 바로 4.3 평화기념관이었습니다.

4.3사건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4.3을 제대로 보고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4.3평화기념관 전시내용을 보면서 제주 4.3사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릇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4.3평화공원에 있는 제주 4.3 평화기념관 모습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제주 4.3평화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7:30(입장마감 16:30)

휴관일(휴무일) 매월 1, 3째주 월요일

입장료 무료

주차장 무료

 

4.3평화기념관 1층으로 들어서면 너른 로비가 나타납니다.

체온 체크와 방역패스 등을 실시한 후 입장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대강당에서 4.3 사건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고 이동하면 전시관을 둘러보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영상은 안내데스크로 요청하면 바로 시청할 수 있고요.

4.3에 대한 다큐가 12분 분량으로 상영됩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 외 송아지라는 애니메이션이 18분, 별이 된 아이들아라는 주제의 샌드아트가 6분 정도 상영된다는데, 4.3 다큐만 보고 전시관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4.3평화기념관 전시관 구성

1전시실부터 6전시실까지 구성되어 있고, 특별전시관으로 다랑쉬굴이 있습니다.

 

제1 전시관,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4.3 당시 피신처로 활용되었던 천연동굴을 모티브로 조성된 입구를 지나고, 4.3에 대한 정명을 기다리며 비문을 새기지 못한 백비가 누워 있습니다.

 

전시관의 첫 만남은 동굴

제주도에 지천으로 널린 용암동굴을 재현한 곳인데, 4.3 사건 당시 살기 위해 산에 오르거나 동굴에 숨어 들었다가 죽임을 당했던 곳입니다.

 

비문없는 누워있는 백비

백비는 흰 비석이 아니라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비석이란 의미입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제2 전시방,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설)

 

해방 전 국제정세와 제주도, 해방 이후 도민들의 자치열망, 4.3 도화선이 된 1947년 3.1 발포사건, 3.10 총파업과 탄압 사건들이 1948년 봉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해방 직전 제주도는 일본군 요새로 전락하고 맙니다.

1945년 3월, 일본 본토가 미군에게 점령당할 위이게 놓이자 제주도의 모든 군을 통솔하는 58군사령부를 창설하고 무려 7만 명이 넘는 군을 배치했습니다.

당시 제주도민 인구는 22만여 명이었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해안가 곳곳에 특공기지가 설치되고 비행장 건설, 땅속 혹은 동굴진지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기쁨이 넘치고, 제주도에서의 일본군 항복조인식은 9월 28일에 진행됐습니다.

제주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무기와 폭발물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와 탱크 등은 폭파했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진 건국운동

 

해방 후 여운영 등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치안유지와 건국활동에 매진했으며,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나 되는 건준 지부가 생겨났습니다.

이 조직들은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됐습니다.

 

자치의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제주

귀향한 청년들은 마을마다 배워야 한다며 학교세우기 운동을 했고, 청년단체 주도로 치안활동을 진행했으며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각 마을을 이끌어 갔습니다.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별로 통일정부 수립이 요원해지더니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는 신탁통치가 불거졌습니다.

결국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이 38선이 그어지고 맙니다.

 

제주도에는 미군 59 군정중대가 상륙하면서 미군정이 실시되고, 친일 경찰과 친일 관리가 재 등용됐습니다.

그리고 1946년 8월 1일 전남의 섬인 도에서 남한의 9번째 도로 승격되었습니다.

 

 남한 정치 지도자들의 노선

 

우익진영의 이승만과 김구는 신탁통치에 함께 반대했지만, 김구는 임시정부 계승을 기도했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에 치중했습니다.

좌우합작의 여운형과 김규식은 해방 직후 건준을 이끌었고 민족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 합작을 시도했으나, 결국 우익과 좌익이 모두 거부하면서 실패했도 여운형은 1947년 7월 서울에서 암살됐습니다.

좌익진영의 박헌영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해 해방정국에서 조직이 가장 강했던 대중정당을 이끌었습니다.

 

제3 전시실,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거부)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의 발생 과정과 배경, 향후 초토화 작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5.10단선, 단정 반대사건 등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대립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길이 멀어지자 1947년 28주년 3.1절 기념대회 2~3만명의 제주도민이 모여들었고, 기념대회가 끝난 후 통일독립을 촉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14시 24분경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총성이 울렸고, 마침 경찰서 앞이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8명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의 실질적인 발생 원인이 된 것입니다.

 

어린이가 말에 치이는 일이 없었든가, 경찰서 앞을 지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주 4.3이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경찰 발포가 있은 후 1947년 3월 10일에는 민관 직장인 95% 이상이 총파업으로 항의에 나섰습니다.

 

제주도청으로부터 시작해 법원과 검찰, 운수회사, 통신기관, 금융기관, 학교로 번졌고 상점들까지 문을 닫았습니다.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도 파업에 동참했다고.

 

제4 전시관,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초토화 작전과 그 이후 한국전쟁 기간까지 제주도에서 자행된 학살의 면모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당시 미군정은 카스티어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파업 원인을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고 분석했습니다.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동조자라는 내용과 함께.

한술 더 떠 경무부 최경진 차장은 기자들에게 제주도 도민 90%가 좌익 색채라는 발언까지 했다고 하네요.

 

1947년 3월 14일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 421명이 급파되었고 이틀 만에 200여명이 연행됐고 고문이 시작됐습니다.

 

제주도가 붉은 섬으로 지목되면서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공공기관과 학교를 장악했습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시켰고 4.3 사건 발발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3.10 총파업 이후 연행된 사람들은 3.3평 유치장에 35명을 구금했다고 합니다.

3.1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 직전까지 1년여 간 무려 2,500명에 이르렀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350명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지목해 습격한 것입니다.

 

미군정은 경비대에 강경진압으로 선회했습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사태의 초기진압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제주에 군경 최고 수뇌부들이 모여 시태의 원인과 해결책을 놓고 군경이 대립했다고 합니다.

 

결국 진압작전이 시작됐고 제주주둔 9연대와 부산 5연대 1개 대대병력을 추가 파병하고 미군 연락기 2대도 제주에 와서 진압작전이 시작됐습니다.

 

4월 17일, 미군 딘 군정장관은 항복을 유도하라는 지시를 했고, 9연대장에게는 무장대와의 협상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에 평화협상이 성사됐습니다.

 

하지만, 평화협상 3일 만인 5월 1일에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합니다.

괴청년들이 오라리에 들이닥쳐 민가에 불을 질렀는데 경찰은 폭도들의 소행으로 몰고 갔으냐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조사 결과 우익 청년단원들의 방화라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미군 방첩대는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의 소행이라는 경찰의 주장만 받아들이면서 평화협상은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협상을 유지하려 했으나 수포로 돌아간 것이죠.

 

당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유혈사태가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제주도에서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결국 제주도 선거는 경찰가족이나 우익청년단 간부 등 극소수만 하고 선거가 끝나자 산에서 주민들이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실시된 선거 결과, 제주도는 남제주군과 제주읍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거가 치러지지 못했습니다.

남제주군에선 무소속 오용국이 당선됐으나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미 군정장관은 선거결과에 충격 받고 경비대와 경찰병력을 대폭 늘리며, 북제주군 갑, 을 두 선거구에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6월 23일 재선거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제주도민의 5.10(강요배 작)

 

하지 중장은 제주 총사령관에 브라운 대령을 임명했고, 브라운 대령은 본인의 임무는 원인에는 흥미가 없고 진압뿐이라는 마인드로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 장담하며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나섰습니다.

 

중학생까지 포함한 무차별 검거작전으로 6주 동안 6천명을 체포했고, 당시 박진경 신임 연대장은 성공했다며 대령으로 특진까지 시켰습니다.

 

죄 유무와 상관없이 선거에 방해된다는 명분으로 무차별적인 검거작전으로 6.23 재선거도 실패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남북이 따로따로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고 38선은 더욱 굳어졌습니다.

 

남한은 5.10 선거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헌법을 공포(7.17)했으며, 이승만을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습니다.

북한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비판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고,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대량 학살은 이후 10월 17일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종부의 최고 지령을 받아 초토화작전을 실시했습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80% 이상 면적)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초고문을 발표했고, 실체 대규모 총살이 진행됐습니다.

제주도가 불바다가 된 4.3의 비극적인 사건이 자행된 것입니다.

당시 중산간 마을에는 100여 마을이 있었고 수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학살은 본격화됐습니다.

 

불바다가 된 중산간마을

중산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집단 희생당한 비극이 되었습니다.

 

제주도에 파병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일부는 동포를 죽일 수 없다며 총부리를 돌려 발생한 여순사건도 발생하였고, 계엄령까지 발생하면서 학살극은 극에 달했습니다.

 

학살의 유형(고길천 작), 4.3 당시의 다양한 학살모습 재현

 

제주도 초토화 작전은 한국군이 집행은 했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 수뇌부가 있었습니다.

 

주한미군 임시 군사고문단장이던 로버츠 준장에게 경찰의 작전권까지 주어지면서 제주도 진압작전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습니다.

 

1949년 1월, 무장대는 급격히 무너졌으며, 1949년 3월 홍순경 무장대는 궤멸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6월 7일 무장대 사령과 이덕구가 경찰에게 사살되면서 이미 무장대는 와해됐지만 상징적인 존재가 이때 사라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집단 사살된 제주도민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형무소 수감자 등에 대해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전세가 역전되자 멈췄다고 합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제주도민 2,500여명이 전국 각지에 수감되어 있던 중 대부분 집단 학살되었습니다.

다만, 독립군 출신의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은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거부해 수백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제5 전시실,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

 

4.3 후유증, 민간에서 시작된 4.3 진상규명운동, 2000년 1월 4.3 특별법 제정, 대통령 사과, 4.3 유해발굴 등 4.3 사건 이후 현재까지의 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은 무장봉기 6년여 만인 1954년 9월 21일에 한라산에서 해제되면서 1947년 3.1 발포 이래 7년 7개월 만에 4.3 사건은 종식되었습니다

 

4.3 사건으로 2만 5천~3만명에 해당하는 제주도민 10%가 희생된 대참사였습니다.

공식 집계한 희생자만도 15,000명이 넘고, 노인과 여성의 희생자 비율은 무려 33%나 됐습니다.

진압작전에 투입된 군인 180명, 경찰 140명가량이 전사했고요.

 

4.3의 비극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4.3과 6.25 전쟁을 겪으며 반공 이데올로기는 더욱 공고화되었고 빨갱이란 말의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77년 초등학교 동창생인 재일동포를 만났다는 이유로 간첩단 조작사건에 휘말려 간첩이 되어 2016년에야 무죄를 받았고, 1964년 일본에 살던 어머니를 만난 아들은 구속됐다가 구속 45년 만인 2010년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좌익이라는 굴레에서 조작된 죄를 받아 고문당하고 구속된 사례가 제법 있나 봅니다,

 

1957년 소설가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이 발표되면서 4.3의 역사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1963년에는 4.3 직전 도일한 역사학자 김봉현이 김민주와 공저로 '4.3무장투쟁사'를 출간하여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열기 속 진실찾기가 시작됐습니다.

 

4.3 사건의 물꼬를 튼 것은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이 발표되면서부터입니다.

소설은 곧 판금되고 작가는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1986년에 제주대에서 4.3 분향소를 설치했고, 1989년 제주지역 시민운동 단체들은 공개적인 4.3 추모제를 개최했습니다.

 

4.3 사건의 진상규명운동은 20세기 끝나는 시점까지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진보정부가 집권한 김대중 정부시절 2001년 1월에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위해 4.3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4.3 특별법 서명문서와 만년필(2000년 1월 11일)

제주도민들에겐 명예회복을 위한 첫 단추가 채워진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4.3 특별법 전부개정안 서명문서와 만년필(2021. 4. 3)

 

이후 2003년 10월 15일 4.3을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가 확정됐고,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이후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해 비극적 역사를 화해와 상행의 정신으로 승화시키는 평화와 인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4년에는 4.3 희생자 추모일이 국가기념일로 공식 선포됐고, 2021년 2월 26일 4.3 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통과하여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과 보상, 불법 군사재판 수형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직권 재심규정을 포함시켰습니다.

 

4.3이 남긴 아픈 상처, 이젠 화해와 상생으로 가야 합니다.

4.3 유족회와 재주경우회는 화해를 선언했고, 이제 역사의 평가만을 남기고 있는 듯하네요.

 

하지만, 아무리 냉전시대에 일어난 일이라 해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6 전시실, 평화의 섬(에필로그)

 

좌우 벽면과 천장에 4.3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특별전시실, 다랑쉬굴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을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한 곳입니다.

 

9연대 2대대는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주민들을 사살한 후 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굴 속에 수류탄을 던져도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사시킨 이라고 하네요.

정말 같은 국민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ㅠㅠ

 

재현된 다랑쉬굴 모습

당시 굴에는 11명이 있다가 희생당했고, 이 중에는 50대 여성, 9살 어린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2층으로 올라가면 기획전시실로 연결됩니다.

 

제주 4.3평화기념관 2층에 있는 기획전시실에는 청년 이재수에 대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요.

지난 1월 31일까지 진행되어 지금은 다른 전시로 바뀌었습니다.

 

청년 이재수 전시 모습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금기시되어 오던 말이었습니다.

이후 진보진영이 정권을 잡으면서 명예회복과 사과까지 받아냈는데요.

개인적으로 대략적으로만 알았던 사실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이곳 4.3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적으면서 전시내용을 가능한 한 대부분을 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내용도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공부는 제대로 한 것 같습니다.

 

오랜시간 한 편의 긴 다큐멘터리를 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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