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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여행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중원고구려비)

by 휴식같은 친구 2022.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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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중원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고구려 비석이라는 의의가 있습니다.

아울러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결정적 유물로서의 가치도 있죠.

 

아울러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밝혀주는 내용도 있어 사료적 가치도 크다고 하는데요.

충주 고구려비가 담고 있는 글자들 하나하나가 우리 고대사를 밝혀줄 중요한 열쇠인 것입니다.

 

충주 고구려비를 보관하고 있는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은 3년 전에 방문했다가, 이번에 다시 방문하게 됐는데, 실내 전시관은 예전과 다를 바 없으나 실외 공원이 새로 조성되어 볼거리를 많이 갖춰진 기분이 들더군요.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과 고구려비 전시관 공원 풍경을 담았습니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은 중앙탑면 영전리 안석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8:00

휴관일(휴무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 연휴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주차요금 무료

 

 

충주 고구려비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1979년에 발견되었고, 보물 205호(국보 지정번호 해제)로 지정되고, 현재는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을 지어 보관, 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울 때에는 중원 고구려비라고 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국토의 중앙이라는 의미로 충주의 옛 지명이 중원이라서 그렇게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전시관은 세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관. 입석마을 이야기

2관. 고구려 이야기

3관. 충주 고구려비 이야기

 

 

마한지역이었던 충지지역은 350년 근초고왕 5년에 백제로 편입시켰습니다.

이후 475년 고구려 장수왕 63년에 충주를 함락하여 국원성을 설치했고, 557년 신라 진흥왕 18년에 국원소경으로 개칭되어 삼국이 모두 거쳐간 지역입니다.

 

이후 940년 고려 태조 23년에 중원이란 지명에서 충주로 개칭하였고, 현대에 들어 1995년에 충주시와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입석마을 이야기

예로부터 이름없는 비석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입석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979년에 충주 고구려비를 발견한 것입니다.

 

고구려 이야기

BC37~391년 고구려의 발원기인 청룡, 392~427년의 고구려의 평창기인 주작, 428~6세기 말의 고구려의 성숙인 백호, 6세기 말~668년 고구려의 부활을 의미하는 현무까지

 

 

충주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흔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 불교가 고구려에서 산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보살 상군(600년 경)

2) 충주 장미산성 : 충주 북서 남한강변에 있는 장미산에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한성기의 토기와 고구려 시대의 끌 모양 화살촉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3) 건흥 5년이 새겨진 금동광배 : 높이 12.4cm로 건흥이라는 연호가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며 아엄이라는 여성이 내세에도 불교에 귀의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석가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

삼족오는 태양 안에 산다고 하는 전설의 샤로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태양 안의 삼족오는 삼족오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독창적인 천문관을 보여줍니다.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엄청나게 큰 탁본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으로 높이가 6.39M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큰 비로 꼽힙니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대왕 생애, 업적 등이 적혀 있습니다.

 

안악 3호분은 북한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인데 1949년에 발굴 조사되었고, 고국원왕 때인 357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주요 벽화로 행렬도, 묘주 부부상, 생활도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서양보다 천 년 앞선 세계 최초의 철갑전사개마무사

 

고구려의 주력부대인 개마무사는 기병이 타는 말에 갑옷을 입히고 이 말에 탄 기병을 말합니다.

화살이나 창으로도 피해를 입지 않아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광개토대왕이 일으킨 정복사업의 주력이었고 5만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장수왕의 꿈, 고구려의 남진과 충주고구려비

 

장수왕은 475년(장수왕 63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합니다.

장수왕의 공격에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 마저 전사하자 백제는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수왕은 한강 상류인 충주를 넘어 금강유역까지 진격하고 백제를 압박합니다.

고구려 영토의 최남단인 충주에 국원성을 설치하고, 남방경영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게 됩니다.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

 

높이 203cm, 비면높이 233cm, 전면폭 55cm, 좌측면폭 37cm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으로 삼고 있습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고, 앞면과 좌측면 일부의 내용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비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한 5세기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충주고구려비 1면(뒷면)

 

마모가 심해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마지막 행의 위에서 1/3 정도 위치에 순(巡) 자로 보이는 글자만 확인되었습니다.

 

충주고구려비 2면(우측면)

 

가로 6행, 세로 23행에 모두 138개 글자가 적혀 있으나 마모가 심해 9자만 읽을 수 있다고 헙니다.

전부라는 부명과 대형이라는 관등명입니다.

 

충주고구려비 3면(앞면)

 

가로 10행, 세로 23행에 230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지금까지 206자가 판독되어 비문의 내용이 가장 잘 보이는 면입니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왕을 ‘고려대왕’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신라토내당주’ 등의 표현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외에 고모루성, 대사자 등 당시의 지명과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중원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금석문은 광개토대왕비 등 매우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석비는 한반도의 중부 지역인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 높게 평가됩니다.

 

충주고구려비 4면(좌측면)

 

마멸된 글자는 많지만 신유년, 우벌성, 고모루성 등 충주 고구려비의 비밀을 풀 핵심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을 관람하고 나오면 새로 조성된 고구려비 전시관 공원이 있습니다.

 

전망대가 있는 언덕

 

전망대 모습

 

전망대에서 바라본 고구려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대길 모습입니다.

 

연못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전망대 모습

 

생동감 넘치는 개마무사

 

고구려 연대길

 

타일벽화로 고구려 역사를 흐름 순으로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장수왕

 

땅따먹기 대왕, 광개토대왕

 

장수왕은 중국 및 북방세력과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대신 모든 힘을 남쪽에 있는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을 남진정책이라 하며, 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이전하여 본격적으로 백제와 신라에 간섭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나제동맹을 채결하기도 했으나 475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개로왕이 전사하고 웅진천도(공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남한강 지역을 차지하여 장수왕대에 최대 영토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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