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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여행] 독립운동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사 기념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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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여행] 독립운동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사 기념관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이제훈과 최희서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2017년 6월에 개봉하여 236만 관객을 동원한 시대극이었는데요.

대일항쟁기 때 일본에서 활동한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박열과 그의 동지 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 박열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박열은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였는데요.

국가보훈처는 매달 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그 정신을 기리고 있는데,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한국인 독립운동가가 아닌 박열의 아내였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선정됐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을 사랑했던 일본인 아나키스트,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모의하다가 체포된 사형수였으며,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선생과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예천을 다녀오던 중 마침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 있는 박열의사 기념관이 있어 관람하고 왔는데요.

독립운동가 박열과 그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독립, 자유정신을 기리기 위해 개관한 기념관입니다.

 

박열의사 기념관 입구

 

박열의사 기념관은 최악의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사람이라는 의미)으로 불리며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거한 박열(1902~1974) 의사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와 그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기 위해 생가가 있는 고향인 경북 문경에 지난 2012년 10월에 개관했습니다.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 의사는 18세 때인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과 메이지대학을 고학으로 다니며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조선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와중에 일본 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돼 22년 3개월이라는 긴 옥살이를 했는데요.

박 의사 구속 때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 여사도 함께 구속됐으나 일본의 회유 공작에 저항해 임신 상태에서 자살했습니다.

박열 의사는 광복 후 초대 재일거류민단장을 역임하고 1949년 귀국해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중 6·25 전쟁 당시 납북됐습니다.

 

박열의사 기념공원 일대 모습

박열의사 기념관에는 박열의사 생가와 그의 정신적 동지이자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자리해 있습니다.

 

박열의사 기념공원의 정자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

 

일본인으로 일제의 멸망과 일왕 폭살의 필연성을 주장한 아나키스트로 1922년 3월 박열을 만나 재일조선인 아나키즘 항일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박문자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을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반입을 추진하다 체포되오 대역죄호 사형판결을 받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1926년 7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그녀의 묘는 문경읍 팔영리에 조성되었으나 일제의 철저한 방치 속에 잊히다가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조성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2003년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이 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장된 것입니다.

 

박열의사기념사업회는 훗날 북에 있는 박열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현 위치에 함께 안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박열의사의 생가지

 

박열의사 기념관 일대에서는 매년 1월 17일(1974년 사망일)에 박열의사 추모제가, 매년 7월 23일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박열의사는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했고, 1923년 일본왕자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한 이른바 대역사던으로 검거되었던 아나키스트였습니다.

 

무려 2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1946년 1월에 열린 신조선건설동맹 창립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10월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단장이 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으로 귀국했으나 1950년 전쟁 때 납북되었습니다.

박열은 1974년 북한에서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당시 재북평화통일촉진협회회장이었다고 합니다.

 

박열의사 기념관은 문경대로를 달리다 오천리 방향 시골길을 1km 정도 달려 도착할 수 있습니다.

 

 

박열의사 기념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00

휴관일(휴무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과 추석 당일

관람료(입장료) 무료

주차장 주차요금 무료

 

박열의사 기념공원 잔디마당 풍경

 

박열의사 기념공원과 박열의사 기념관 안내

 

1층 로비에 마련된 박열의사 포토존

 

1층 1전시관,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1전시관 모습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박열은 탑골공원에서 열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조선독립신문을 민가에 배포하는 일을 했습니다.

 

격고문 등을 경성 시내에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가 고모산성에 올라 태극기를 꽂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박열의 가계도, 박열의 집안내력과 출생

 

박열예천 금당실마을 함안 박씨 운의 13세 손입니다. 

할아버지 박의성은 1880년대에 함창 인근의 모전으로 이주했고, 아버지 박영수와 어머니 정선동 슬하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마성면 오천리로 이주하여 터를 잡았다가 1936년에 상주군 화북면으로, 그 후 충북 음성군 금왕면 금석리로 이주하였다가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금당실마을은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모습과 고즈넉한 돌담길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인데요.
전쟁(임진왜란 당시에도 안전했던 마을)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던 십승지 중 한 곳이기도 합니다.

 

[예천여행] 돌담길이 예쁜 십승지 전통마을, 예천 금당실마을

 

오천리 샘골로 이전하였고, 박열이 5살 때인 190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7살엔 서당에서 찬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배웠습니다.

성적이 우수했고, 성격도 쾌활해 언제나 친찬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고 합니다.

 

10살이 되자 상주군 함창에 있는 함창보통학교로 진학했습니다.

1916년 수재들이 모인다는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사범과에 입학했고,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했으며 그해 10월에 동경으로 건너갔습니다.

 

 

해방 후 박열은 1947년 동경청년회관에서 장의숙과 결혼을 했습니다.

장의숙은 국제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해방된 조국의 재동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보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었고, 한국정쟁 때 남편이 북으로 납북되자 동경으로 이주해 자녀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장의숙은 1972년 고국으로 돌아와 외국어대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6년 갑작스럽게 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아들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준장으로 예편, 딸은 일본에서 결혼했습니다.

 

박열의사의 생애와 발자취

 

1920년 당시 19세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민족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1921년 재일조선인고학생 동우회를 확대 개편하고 1922년에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를 창간했습니다.

 

이때 박열 주도로 니아가타현 탄광 조선인 노동자 100여 명 살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청하며 규탄하는 등 아나키스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22년 11월 재경조선인 무정부주의자 흑우회를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우회를 조직했고 '후토이 센징'을 창간했습니다.

 

1923년 10월 대역죄 협의로 구속, 1926년 3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사형선고, 4월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945년 조선 해방이 되었고, 그해 10월 27일에 석방되었습니다.

 

박열의 동반자 가네코 후미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조선인들의 반항운동에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열을 만나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발견하고 오히려 박열보다 더 강렬한 항일 감정을 보일 정도로 천황제를 부정하였다고 합니다.

 

1903년 가네코 후미코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조선생활

기구한 가족사로 인해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부의 양녀로 자랐는데요.

1919년 조선에서 3·1 운동의 열기를 몸소 겪은 가네코는 일본 외가로 돌아갔다가 1922년 재일 조선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와 동지이자 연인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6년 동안 할머니와 고모의 차가운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여러 번 기도하기도 했다네요.

 

 

박열과의 만남과 옥중결혼, 사형판결과 감형

가네코는 1923년 박열 의사와 함께 히로히토 일왕과 왕세자를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는 당시 법정 심문에서 “나는 천황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폭탄을 던져 천황도 우리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옥중에서 박 의사와 혼약을 맺은 그는 1926년 2월 도쿄에서 열린 첫 공판에 흰 한복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출두해 자신의 이름을 “박문자”라고 밝혔고, 같은 해 3월 26일 최종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만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1904~1926)의 확고한 천황제 부정

 

가네코 후미코(1904~1926)의 생애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평가

 

가네코가의 고향인 야마나시군 스와촌 소마구치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

 

1926년 7월 23일 우츠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 감방에서 자살, 1926년 8월 16일에 박열의 형 박정식과 조카 박형래가 유골을 수습하러 동경으로 건너왔습니다.

1926년 11월 5일 문경읍 팔령 1리에 매장했습니다.

 

 

옥사한 지 92년 만인 2018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됐습니다.

 

박열의 각종 단체 조직활동

재일조선인 고학생 동우회, 흑도회, 풍뢰회, 흑우회, 흑로회, 불령사

 

5월의 독립운동가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선정된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이면서 법률가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박열은 1921년 혈권단을 조직해 활동할 때부터 후세 변호사와 밀접한 연대를 했다고 합니다.

 

 

후세는 훗날 ‘일본의 쉰들러’로 불린 인권변호사로 평생 약자를 위해 싸워왔다고 하는데요.

187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변호하면서 조선과의 연대 활동에 나서왔습니다.

그는 수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의 변호인을 자임했고 일왕 암살 모의 혐의를 받은 가네코와 박열을 위해서도 법정에서 싸웠고, 가네코의 유해를 거둬 한국으로 운구한 것도 그였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후세는 1932년 법정 모독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1933년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투쟁에 매진하다 1953년 별세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후세에게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습니다.

 

박열 어록과 옥중 논문

 

2층 2전시관, 천황 타도의 선봉에 서시고, 민주개벽의 건물이 되시다

 

2층 전시관 모습

 

박열의 항일 사상과 민족정신

간토 대지진과 박열의 구금

 

재판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모습의 박열

 

당시 박열은 조선관복을,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재판을 받았는데요.

1926년 3월 사형판결 후 박열은 미소를 지으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박열과 가네코가 발행한 기관지들

 

흑도(1922.7.10 창간), 4쪽짜리 신문

후토이센징(1922년 11월 창간), 흑도 폐간 후 불령선인(못된 조선 놈)을 발행하려다가 거부하자 이름 변경함

현사회(1923.3.15 창간), 후토이 센징 3호부터 제호를 바꾸어 발행

 

동경지방 재판소 예심법정에서의 항일투쟁

 

 

옷을 입고 일제강점기 법정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유적 

팔영리 가네코 후미코 묘소 터, 가네코 후미코의 부강생활지, 박열의사 기념공원, 박열 출생지

 

 

일본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유적 

형무소, 가네코의 출생지, 가네코의 외가, 세이소쿠 영어학원, 가네코의 또 다른 고향, 박열과 가네코가 함께 생활한 곳

 

납북 후 북한에서의 박열의 활동

 

박열, 가네코 후미코를 연구하는 사람들

 

박열의사 기념관에 자료 기증, 후원한 사람들

 

야외 박열의사 기념공원에 있는 의사 박열선생 추모비

 

박열의사 기념공원 정자

 

정자에서 바라본 가네코 후미코의 묘

 

박열의사 기념관 모습

 

 

독립운동가 박열을 비롯하여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그의 변호사인 후세 다쓰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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