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화진포] 이승만 별장과 이승만대통령 기념관
화진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 있는 동해 연안에 형성된 호수(석호)로 해당화가 꽃 피는 나루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화진포는 동해안의 석호 중에서 둘레가 16㎞로 최대 규모입니다.
화진포의 아름다운 호수와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한국전쟁 전후로 남북의 지도자들의 별장으로 이용했는데요.
이승만 별장을 비롯하여 이기붕 별장,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는 북한의 김일성 별장 등이 있으며, 이곳을 일컬어 화진포역사안보전시관이라 부릅니다.
고성 화진포, 화진포해수욕장 전망의 김일성 별장(화진포의 성)
[고성 화진포 화진포역사안보전시관]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이기붕 별장
이번 이야기는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었던 화진포역사안보전시관, 이승만 별장과 이승만대통령 기념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 별장은 김일성 별장, 이기붕 별장과는 약간 떨어진 화진포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별장 역시 이기붕 별장, 김일성 별장과 함께 화진포역사안보전시관 통합관람권으로 함께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 별장 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삶에 대한 전시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을 함께 관람하면 됩니다.
화진포 역사안보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11~2월 09:00~16:30, 3~10월 09:00~17:00
휴무일 연중무휴
관람료(입장료) 통합권 어른 3,000원, 청소년/어린이 2,300원
(장애인, 유공자, 현역군인은 무료, 고성군민은 50% 할인)
통합관람권 이용처 화진포 생태박물관, 김일성별장, 이기붕별장, 이승만별장
주차장 무료
이승만 별장에서 바라본 화진포(서)
이승만별장은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별장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한데 어우러진 화진포 두 개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까닭에 화진포의 세 별장 중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1910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선교사를 만나러 화진포에 왔다가 그 풍광에 반했다고 합니다.
이승만 별장은 한국전쟁 이후 화진포가 있는 고성까지 되찾았고, 선교사 집이 있던 자리에 1954년 27평 규모로 신축해 1960년까지 별장으로 사용했으며, 주로 화진포호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별장은 선교사 집을 보수해 별장으로 사용한 반면 이승만 별장은 새로 신축한 것이 다른 부분이네요.
이승만 초대 대통령 전시관
이승만의 출생부터 유학시절,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등 근대사와 함께한 역사기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층으로 이루어진 이승만 별장 모습
1960년 4.19 혁명 이후 하야 후부터 이 별장은 방치, 철거되었다가 새로 육군관사를 지어 사용했는데요.
1999년 육군에서 본래의 이승만 별장으로 복원하여 자료와 유품을 전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엔 본래의 별장터에 세워진 본 건물을 보수하고 별장에 있던 유품과 이화장에서 추가로 기증을 받아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별장에서 바로 보이는 화진포
맞은편 소나무 숲에 이기붕 별장이 보이고, 산 중턱에 김일성 별장도 아스라이 보입니다.
화진포 앞 이기붕 별장이 있는 소나무숲
화진포 별장의 유래
화진포는 바다의 일부가 와해와 분리된 석호로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다운 동해안의 명승지입니다.
그래서 1900년대 초 외국인 선교사들의 예배당과 별장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이승만이 화진포의 매력에 매료된 것은 1911년 전국순회 전도여행 중 이곳 외국인 선교사 별장에 들러 친교를 맺었던 적이리고 합니다.
북한땅이었던 이곳이 한국전쟁 이후 우리 국군이 수복해 우리나라 땅이 되면서 1953년 11월, 군민을 격려하기 위해 42년 만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때 방첩대장의 안내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이곳의 외국인 선교사 별장을 찾아 휴양지로 정하고 낚시도 하고 자연을 즐기면서 남북통일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실엔 이승만 대통령과 1934년 결혼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아내가 앉아 있는 모습
부인인 프란체스카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이승만을 따라 하와이로 갔고, 그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이승만 사망 이후에 고향 오스트리아로 잠시 돌아갔다가 1970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화장에서 그녀의 양자인 이인수 부부와 함께 거주했으며 한국 최초 퍼스트레이디로서 국가 원로로 예우받았습니다.
1992년 3월 19일, "관속에 태극기와 성경책 그리고 남북통일이라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넣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91세를 일기로 이화장의 집에서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국립 서울현충원 이승만 대통령묘소에 합장되었습니다.
이화장은 현재 이승만 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승만 별장 침실
별장 집무실
이승만 별장 위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
1954년 27평 규모로 신축해 1960년까지 별장으로 사용했다가 방치된 후 철거, 육군관사로 사용했는데요.
1997년 별장을 복원했고, 2007년에 본래의 별장터에 세워진 본 건물을 보수하고 별장에 있던 일부 유품과 이화장에서 추가로 기증받아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 배치도
작은 전시관이지만 총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고, 1877년 서울로 이사해 한학을 공부했으나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입학, 1891년 박승선과 결혼했습니다.
(본처 박승선은 6.25 전쟁 중 한강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인민군에게 사살됨)
1898년에 만민공동회 참여를 계기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매일신문과 제국신물을 창간했습니다.
1899년 박영효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오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1904년 특별 사면령으로 석방되었고 한국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조지워싱턴대학에서 학사, 하버드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10년 귀국해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1911년 신민회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총독 암살모의로 날조하여 105명을 체포한 사건)에 연루되어 압박을 받자 도미, 해방된 1945년 10월까지 미국에서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국무총리, 1920년에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5년 여러가지 이유로 탄핵당해 대통령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이후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193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34년 뉴욕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재혼을 했는데, 본처 박승선이 있는 상태의 이중결혼이란 비판이 있습니다.
1945년 10월 16일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고 1946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8년 국회의원 중 나이가 가장 많아 의장에 선출된 후 7월 24일 국회에서 선거로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50년 5월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이 60% 이상 당선되자 재집권이 어렵다고 보고 1951년 자유당을 조직, 국회선출 대신 국민직접선출로 개헌을 추진하자 야당이 반대에 막혔습니다.
이에 1952년 임시수도 부산과 경남, 전남북 일부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야당 의원들을 구속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릅니다.
결국 1952년 8월 5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74.6%로 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 새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고,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으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56%의 득표로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고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인물정보 인용)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옷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우남 이승만 박사 연보
이화장
이승만 박사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던 사저로 1945년 해방 후 돈암장과 마포장에 기거하다가 1947년부터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제헌국회를 소집해 5.10 선거를 치렀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헌법을 제정했으며 초대 대통령에 선임되어 정부수립을 선포했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생활하면서도 이화장에 가끔 들러 정원과 뒷 산길을 산책했다고 합니다.
전통 한옥인 본체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영부인의 검소한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유품을 전시하는 이승만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흉상
이승만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근대 국가의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한 공로가 인정됩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등을 통해 전두환보다 훨씬 많은 국민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권력을 잡기 위해 분단정부의 수립을 주도하고 친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으며, 독재를 위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막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열린송현광장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을 고려한다는 발언에 논란이 일었습니다.
독립운동 공여와 초대 대통령이란 상징성이 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와 독재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인물의 기념관을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에 짓는다는 건 다시 재고할 사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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