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서예가, 금석학자, 실학자입니다.
한국 서예사와 학문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본관은 경주 김씨, 자는 원춘, 호는 추사, 완당 등입니다.
전통적인 조선의 서예에서 벗어난 추사체를 완성했고, 제주도 유배기간에 그린 세한도 등은 예술성과 철학이 결합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는 추사가 나고 자란 곳으로 추사 김정희 유적지가 있는데요.
추사 김정희 고택, 김정희 묘, 추사기념관울 비롯하여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 묘와 화순옹주 홍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와 심은 용궁리 백송,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이 있는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등 그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은 추사 김정희 고택과 추사 김정희 묘 등의 풍경을 담았습니다.

추사 김정희 유적지 모습
좌측에 추사기념관이 있고, 중앙 푸른 잔디밭은 추사 김정희 묘가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글과 그림, 글씨가 독창적이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일찍 글을 깨우치며 천재성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24세인 순조 9년(1809)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간 김정희는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이후 일생 교유하였습니다.
또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고, 귀국한 후에는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김정희는 제자가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습니다.
55세 때인 헌종 6년(1840)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고, 그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헌종은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하여 유배 중에도 글씨를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 고택 주변 안내도입니다.
추사고택 주변에는 고조부 김흥경의 묘역과 천연기념물인 용궁리 백송, 월성위 부부의 묘역 및 화순옹주의 홍문, 그리고 김정희 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또 선생 집안의 원찰이었던 화암사가 있고, 화암사 뒤편에는 선생이 바위에 새긴 필적암각문 '시경', '천축고선생댁' '소봉래' 등의 글자가 남아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집안의 원찰, 화암사와 김정희 선생 필적암각문

정면으로 보이는 추사 김정희 묘

추사 김정희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사기념관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생애와 그의 업적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바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우측이 바로 추사 김정희 고택입니다.

추사 김정희 고택 입구
추사 김정희 고택은 조선후기 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태어나서 자란 곳입니다.
이곳은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이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1720~1758)와 혼인한 뒤 이곳을 하사 받아 지어진 집입니다.
예산의 집은 53칸이었고,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비용을 분담해지었다고 합니다.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사랑채, 안채, 사당)해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저택인 월성위궁은 김정희가 관직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던 곳입니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소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머물렀다고 전해집니다.
김정희 선생 고택은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고택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은 사랑채입니다.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습니다.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고, 대청 쪽으로 난 문은 모두 들어열개 문으로서 위로 활짝 열 수 있어 개방적입니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성이 잘 살아 있는 구조인데요.
고택에 있던 김정희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 화재로 불타버렸답니다.


사랑채 내부 모습

사랑채 앞에 있는 해시계 돌기둥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며, 이 돌기둥을 해시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건물 전체는 동서방향이지만, 이 돌기둥은 남북방향으로 자리하고 있고, 돌기둥에 새겨진 '석년'은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새긴 것입니다.

사랑채 뒤에는 추사 김정희 고택 안채가 있습니다.

안채는 ㄷ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는데요.
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고,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왕실 주택 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라네요.

안채 내부 모습

안채 뒤쪽 공간

사당으로 쓰고 있는 추사 김정희 고택 영당

영당은 김정희가 죽은 후 아들 김상무가 세운 것입니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고,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습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습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고택 모습

추사 김정희 묘 옆에도 한옥 건물이 있는데 설명문도 없고 문도 닫혀 있습니다.
후손이 살고 있는 공간인가?

추사기념관과 추사 김정희 고택 사이에는 추사 김정희 묘가 있습니다.
고택에서 약 100m 거리의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 묘 앞에 홀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김정희의 생애를 바라봤을 것 같습니다.

추사 김정희 묘는 김정희와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안 이씨 세 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비문은 1937년에 후손인 김승렬이 짓고 새겼습니다.

김정희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조선의 대학자인데 문인석 등이 하나도 없는 것이 다소 의외입니다.
인근에 있는 고조부 김흥경의 묘와 증조부 월성위 김한심 묘에는 문인석이 세워져 있는데 말입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는데요.
죽기 전까지 글씨 쓰기를 계속했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판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을 쓴 것이 죽기 사흘 전이었다고 합니다.
장례식에는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고, 제자들이 다투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문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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