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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청백리의 황희정승, 파주 황희선생 묘

by 휴식같은 친구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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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의 황희정승, 파주 황희선생 묘

 

 

황희선생 유적지에 들렀다가 가까운 곳에 황희선생 묘가 있다고 해서 이동했습니다.

 

청백리와 두문불출의 황희정승, 파주 황희선생 유적지와 반구정

 

황희정승 묘는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자리하며 황희선생 유적지로부터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방촌 황희선생의 묘로 1976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황희선생 묘 입구

 

다음은 황희선생의 일대기를 네이버 지식백과를 인용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1376년(우왕 2)에 음보로 복안궁 녹사가 되었고 이후 사마시와 진사시,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에 성균관학록에 제수 되었습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지내 두문불출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394년(태조 3)에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요청을 수용하며 성균관학관, 직예문춘추관, 감찰 등을 역임했습니다.

1398년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 하여 문책당한 일이 있으며, 이후 경기도도사를 거쳐 형조·예조, 이조,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습니다.

 

 

1401년(태종 1) 경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고,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그해 말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고,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습니다.

형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내다가 1415년에 송사처리와 관련해 파직당했고, 호조판서를 역임하다가 세자인 양녕대군의 비행을 옹호하다가 다시 파직됐습니다.

 

이후 다시 조정에 복귀하여 공조판서,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고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에 유배되었습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22년(세종 4)에 참찬으로 복직, 예조판서, 대사헌, 우의정에 올랐고, 1427년에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1430년 좌의정으로있을 당시 태석균의 잘못(감목을 잘못해 국마 1,000여필을 죽인 죄)을 선처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이후 파주 반구정에 은거하다가, 1431년에 영의정부사에 올랐고 1449년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운영하다가 사퇴하고 반구정에 은거, 145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태종과 세종 재위기까지 관직생활을 하며 국방 강화, 예법 정비, 외교문물제도의 정비, 농업 진흥,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 진흥의 지휘감독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세종 대에는 세종 대의 성세를 이룩한 인물로,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황희정승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보입니다.

 

황희선생 묘

묘역은 3단으로 넓게 조성되었고 묘 둘레는 34m, 높이가 4m로, 봉분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황희정승 묘 앞에 있는 문인석과 동자상

 

다른 묘의 형태와는 달리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하여 전면을 ㄷ자 모양으로 전방을 향해 3단의 호석을 쌓아 봉분과 연결시킨 특이한 봉분구조를 보입니다.

 

황희정승 묘 앞에 서 있는 혼유석과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4개의 화창이 투각 된 장명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동자상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세워져 있습니다.

 

황희선생 묘에서 바라본 입구와 마을풍경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봉분이 조금 파헤쳐진 모습이네요.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 있는 묘표

황희정승과 그의 부인 청주 양씨가 함께 묻힌 합장된 봉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쪽으로 내려오니 커다란 향나무가 있는데,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향나무 앞엔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인 듯...

 

그 아래쪽에도 건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황희정승 묘 아래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의 업적과 일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인데요.

원래의 신도비는 1505년(연산군 11)에 세어진 것으로 신숙주가 글을 짓고 안침이 쓴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마모가 심해 글씨 판독이 어려워지자 1945년에 새 신도비를 세워 현재 신도비 2개가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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