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9대 임금 성종과 11대 임금 중종의 조선왕릉, 선릉과 정릉(선정릉)
서울 삼성동에 있는 선릉과 정릉
선릉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과 성종의 세 번째 왕비 장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며, 정릉은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단릉인 조선왕릉입니다.
예전엔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먼 시골이었겠지만 지금은 조선왕릉 중 서울 도심에서 제일 가깝고, 아니 가깝다기보다는 회색빛 빌딩 숲 속에 있는 녹색의 섬이라는 표현이 맞는 조선왕릉이 선릉과 정릉(선정릉)입니다.
예전에 두어 번 방문한 이후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조선 9대 임금 성종과 11대 임금 중종의 조선왕릉, 선릉과 정릉(선정릉) 풍경을 담았습니다.
선릉과 정릉은 강남구 삼성동, 도심 한복판에 있는데요.
선릉역 8번 출구에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선정릉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시대 40기 중 2기의 조선왕릉이 있는 곳입니다.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지속된 조선시대 역대 27명의 왕과 왕비 그리고 사후에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18개 지역에 40기, 73명의 무덤이 있습니다.
선릉과 정릉 주차장과 관람정보
선릉과 정릉(선정릉) 관람안내
관람시간 : 2~5월/9~10월 06:00~18:00, 6~8월 06:00~18:30, 11~1월 06:30~17:30 (도심에 있어 새벽시간부터 개방)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관람 소요시간 40분~1시간
관람요금(입장료) 25~64세만 1,000원, 그 외 무료
주차장 2시간 이하 주차 시 5분에 400원, 1시간 4,800원, 2시간 초과 시 5분에 600원, 1시간에 7,200원
(주차장 운영시간은 하절기 06:00~22:00, 동절기 06:30~22:00)
매표소가 있는 곳에서 좌측에 선릉이, 우측에 정릉이 있습니다.
성종이 중종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선대부터 보기 위해 좌측으로 먼저 향했습니다.
좌측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왕릉은 700미터, 정현왕후의 왕릉은 800미터 떨어져 있고, 재실과 역사문화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측에는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왕릉은 250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선릉은 성종과 정현왕후가 동원이강릉 형태로 있고, 정릉은 중종 홀로 단릉으로 있습니다.
동원이강릉은 같은 장소에 산줄기를 따로 해서 모신 무덤을 말하고, 단릉은 왕이나 왕비 한 분을 모신 무덤을 말합니다.
선릉의 동원이강릉은 다른 조선왕릉의 동원이강릉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는 편인데요.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봤을 때 서쪽 언덕은 성종, 동쪽 언덕엔 정현왕후의 능이 있습니다.
선릉으로 향하는 길
강남 한복판에 선정릉이 있어 이런 숲길을 걸어보니 이채롭습니다.
선릉과 정릉의 재실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며, 평소에는 참봉 등의 관리가 상주하면서 왕릉을 돌보는 곳이었습니다.
재실 모습
재실 뒤쪽에 있는 느티나무
수령이 500년 된 은행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1494년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에 능을 조성했다가, 1530년(중종 25)에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곳 선릉에 왕릉을 조성했으니 이 느티나무도 선릉이 조성도리 당시에 심어진 것이 아닌가 싶네요.
선릉과 정릉(선정릉) 역사문화관
선릉과 정릉이 조성된 이야기와 성종과 중종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선릉으로 가는 길
도심 속에 있는 녹색지대의 오솔길이라 더욱 정감이 가는 풍경입니다.
선릉,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조선왕릉의 홍살문
선릉은 능역 안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각각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을 조성했습니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봤을 때 서쪽 언덕이 성종의 능, 동쪽 언덕이 정현왕후의 능입니다.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는데요.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향로(향과 축을 모시는 길)와 어로(임금이 다니는 길)가 있습니다.
선릉은 정릉과 함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들이 능을 파헤치고 재궁(관)까지 불에 타는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자각 서쪽엔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과 동쪽엔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수복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자각
제향을 지내는 공간으로 위에서 봤을 때 '丁'자를 닮아서 정자각이라 부릅니다.
정자각 좌측은 성종, 우측은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동원이강릉 두 개 모두 보이지 않습니다.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둔 비각
신도비는 묘의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말합니다.
정자각 옆으로 나오면 성종의 능침이 보이고, 그 위에 능이 살짝 보입니다.
성종(1457~1494년, 재위 : 1469년~1494년)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1461년(세조 7)에 자산군, 숙부인 조선 8대 임금 예종이 1469년에 세상을 떠나자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을 시작하였는데요.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부터 편찬해 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습니다.
성종의 능으로 올라갈 수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정자각 모습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능입니다.
능 앞에는 무석인과 문석인, 장명등과 석마, 석상 등이 세워져 있는 전형적인 조선왕릉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정종의 능을 뒤로하고 돌아가면 성종의 비 정현왕후의 조선왕릉이 나옵니다.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1462~1530년)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했으며,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는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고,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고 합니다.
이후 연산군은 즉위 후 성 윤기견과 폐비 윤씨에 관한 일을 알면서 친어머니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난간석주
능 주변에 묻혀 있다가 빗물에 토양이 일부 유실되면서 발견된 것인데요.
정현왕후릉 조성 당시나 그 후 보수과정에서 파손되어 묻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현왕후의 능
성종의 능과 같이 무석인과 문석인, 장명등과 석마, 석상 등이 세워져 있는 전형적인 조선왕릉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선릉에서 산책로를 따라 600여 미터 이동하면 정릉이 나오며,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조선왕릉의 홍살문이 있습니다.
정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능으로 1544년(중종 2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45년에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에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 윤씨에 의해서 중종의 능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릉이 지대가 낮아 물에 잠기는 일이 잦으면서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의 태릉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정릉 바로 옆에는 강남 도심 빌딩들이 있는데요.
예전의 왕릉 영역이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정릉의 정자각
중종(1488~1544년, 재위 1506~1544년)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는데요.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릉은 중종 홀로 묻혀있는 단릉입니다.
중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정릉엔 홀로 있는데요.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1487~1557)는 대군 시절 혼인하여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왕비가 되었으나 7일 만에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양주 온릉에 묻혀 있습니다.
[조선왕릉]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비 단경왕후의 능, 양주 온릉
두 번째 왕비는 장경왕후 윤씨(1491~1506)로 후궁이었다가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1515년 훗날 12대 왕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양 서삼릉의 희릉에 묻혀 있습니다.
세 번째 왕비는 문정황후 윤씨(1501~1565)로 1517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534년에 경원대군(훗날 13대 임금 명종)을 낳았고, 1565년(명종 20)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 태릉에 묻혀 있습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강남 도심 빌딩숲
정릉의 비각
정릉 모습
정릉 역시 선릉과 함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능이 파헤쳐져 재궁(관)까지 불에 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문석인과 무석인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습니다.
정릉의 석물은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 제작한 것이랍니다.
가까운 곳에 선릉과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도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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