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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 정약용 생가 여유당, 정약용 묘, 다산문화관

by 휴식같은 친구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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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 정약용 생가 여유당, 정약용 묘, 다산문화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시인, 철학자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중요한 인물 중 한 분입니다.

 

그는 남양주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실학에 눈을 뜨며 실사구시 정신을 강조한 학자였으며, 농업과 수리공학, 기계공학 등 과학기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1801년부터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유배기간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하며 유명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유배에서 풀려나 그의 생가인 여유당에서 연구와 저술활동을 계속하며 그의 사상과 업적은 우리나라 역사와 사상사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는 정약용 유적지가 있는데요.

지난 주말 오랜만에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과 정약용 묘 그리고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 등을 둘러봤습니다.

 

남양주 정약용 유적지 입구

 

정약용 유적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곳이며,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오랜 유배생활을 한 후 다시 이곳에 돌아와 숨을 거둔 곳입니다.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많은 저서를 남겨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곳엔 그의 생가인 여유당과 선생의 묘,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 등이 있으며, 그의 실학사상을 기념하기 위한 실학박물관과 팔당호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다산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실학사상과 실학자 탐구, 남양주 실학박물관

팔당호 전망이 좋은 다산생태공원

 

 

 

그가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에는 다산유적지가 있는데요.

첫 4년을 기거했던 사의재와 그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생활, 유배생활, 해배 이후의 저술활동 등 가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다산박물관, 유배가 풀릴 때까지 머물며 저술활동과 제자를 가르치며 머물렀던 다산초당이 있습니다.

 

[남도답사 일번지) 다산 정약용의 첫 유배지, 강진 사의재

강진 남도답사 일번지, 다산박물관

[남도여행 다산유적지] 다산초당

 

정약용 유적지 주차장은 그동안 무료로 운영을 했는데, 이번에 방문해 보니 입구에 주창차요금 징수기계가 설치되어 있네요.

지금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조만간 주차장이 유료로 바뀔 모양입니다.

 

장약용 유적지 앞에 있는 조형물은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약 500여 권에 이르는 서택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형상화한 조형물입니다.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했던 거중기

실물의 1/2 크기로 재현한 것입니다.

 

1792년(정조 16)에 다산 정약용은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 4.4m, 너비 1.7m의 거중기인데요.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들어 10톤의 돌을 들어 올리는 등 건축비를 대폭 절약했던 것입니다.

 

정약용 유적지 앞 담장엔 여름 수국이 피어 있습니다.

 

정약용 유적지 안내도

 

입구에 다산문화관, 그 뒤에 다산기념관이 있고,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서화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화관 앞에 그의 생가인 여유당이 있고, 억덕 위에 정약용의 묘가, 서쪽 아래쪽에 문도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약용 유적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 ~ 18:00(30분전 입장마감)
휴관일(휴무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다음 날), 매년 1월 1일과 설 당일, 추석 당일

입장료(관람료) 무료

주차장 현재는 무료

 

정약용 유적지 정문에는 정약용이 추구했던 실학사상을 잘 나타내는 실사구시(사실에 기반하여 진리를 추구한다)가 적혀 있습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 정면에 여유당이, 그 뒤 언덕에 정약용 묘가 보입니다.

 

그리고 좌측에는 그의 사당인 문도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입구에 있는 다산문화관에 들렀습니다.

정약용 선생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한 전시 체험장입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미래의 정약용

 

상상마루 체험존

아이들 체험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네요.

 

유생복 입어보기

 

하피첩에 전하는 아버지의 가족사랑

 

정조 승하 후 마재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포항과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생활에서도 저술활동과 제자를 길러냈고, 수시로 아들들에게 편지로 가르침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고향의 부인은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혼인 때 입었던 빛바랜 활옷을 내냈고, 선생은 이를 재단하여 4개의 서첩을 만들었는데요.

가족 간 화목과 선비로서의 마음가짐, 공부법 등 가르침을 적어 아들들에게 보낸 것이 하피첩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생애

 

1762년 마재마을에서 넷째로 태어남

1768년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아 삼지자집 엮음

1776년 풍산 홍씨 홍혜완과 혼인

1777년 성호 이익 유고, 실학에 뜻

1783년 초시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고 맏아들 학연 얻음

1784년 두미협에서 한양으로 가던 중 천주교 접함

1789년 전시 합격, 관직생활 시작, 주교(배다리) 설치하여 정조 행차를 도움

1792년 수원 화성 설계, 가중기와 유형거 발명

1794년 경기지역 암행어사 활동

1795년 승정원 동부승지,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노론에 의해 외직으로 물러남

1797년 좌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 황해도 곡산부사 제수

1799년 형조참의, 마과회통 완성

1800년 정조 승하, 마재마을로 귀향

1801년 장기와 강진 유배, 정약전과 영원히 이별

1817년 경세유포 초고 완성

1818년 목민심서 초고 완성, 유배 해제되어 마재마을 귀환

1819년 흠흠신서와 아언각비 초고

1820년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곡운구곡 유람

1822년 회갑, 스스로 묘지명 지음

1836년 회혼일에 세상을 떠남

 

다산문화관 뒤에 있는 다산기념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성장기, 사환기, 유배기, 만년 삶

 

조선의 과학기술을 일으킨 정약용

 

다산기념관 모습

 

정약용의 가계와 학통

 

그의 어머니 혜남 윤씨는 윤선도의 혈통이고, 그의 형 정약전은 같은 천주교 신자로 함께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 영영 만나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오가며 정약전은 바다생물 백과사전인 자선어보를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정약용의 학통은 실학박물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학사상과 실학자 탐구, 남양주 실학박물관(자산어보 특별전)

 

정약용의 유배길

유배를 즐기며, 그의 저술활동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유배기간 동안 보은산방, 사의재, 다산초당에서 머물렀으며, 유배지에서 저술한 책으로는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이 있습니다.

 

다산, 해배되어 돌아오다

 

마현으로 돌아가기 전 제자들을 불러 모아 다신계를 맺고 우의를 다졌습니다.

14일간의 여정 끝에 마현의 집으로 돌아온 후 그간의 저술을 수정, 보완하여 50여권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다산, 한강을 주유하며 조선을 발견하다

가족과의 재회, 저술을 완성하며 북한강을 기행하며 새로운 조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다산, 마현에서 교유하다

마현에서 다산은 학문적 교유를 계속했습니다.

 

다산, 선생의 생각을 읽다

 

글씨로 읽는 정약용

 

다산 정약용 유적지 풍경

좌측이 여유당, 우측이 서화관입니다.

 

정약용 유적지의 문도사

 

정약용을 기념하고 그의 학문적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며, 관련 유물과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문도사라는 이름은 문(文)과 도(度)의 뜻을 합쳐 문화를 측정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는 정약용의 학문적 깊이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문도사 모습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 뒤편 언덕엔 정약용의 묘가 있고, 그 앞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지묘'

 

정약용 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엔 광주군 초부면 마현(마재))에서 아버지 나주 정씨 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고산 윤선도 후손)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묻히신 곳입니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과 동복형인 약전과 약종, 누이(매형이 이승훈)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의 관직생활(1783~1800)과 강진 유배생활(1801~1818)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의 뒤를 이어 조선시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후기 개화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 다산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한국 최대 사회과학자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정약용의 묘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한 원형의 묘로 남향하고 있고, 묘 앞에는 비좌와 비신 및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갖춘 비가 있습니다.

비신에는 ‘문도공다산정약용 숙부인풍산홍씨 지묘’라고 씌어 있습니다.

묘역 앞에는 1959년에 세운 묘비 2기와 자연석에 여유당이라 쓴 비가 있습니다.

 

정약용 묘에서 내려오다 보니 그의 생가였던 여유당이 보입니다.

 

여유당 옆 연밭

연꽃은 지금은 다 진 상태였습니다.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호인 여유는 정약용이 1800년(정조 24) 봄에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를 지은 후 명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정조는 형조참의로 있던 정약용을 무한 신뢰했으며,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막역지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약용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했던 시절, 제거하려던 명분을 찾다가 형 약전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쫓고 말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계속 만류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재가, 가족들을 데리고 마재 마을에 와서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걸고 은신했던 것입니다.

이후 노론에 둘러싸여 의문의 죽음을 맡게 되었다고.

 

여유당 모습

원래는 다산유적지 입구 자차장 부근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소실되어 유적지 내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되어 있어 소박한 모습입니다.

 

사랑채

 

안채 옆에 있는 우물과 장독대

 

여유당 앞에 있는 서화관

정약용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그의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 및 문화 공간입니다.

 

정약용 유적지 모습

 

1986년 이래 매년 이곳에서 펼쳐지는 정약용 문화제(다산문화제)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다채로운 시민 행사와 공연으로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로 정착한 것 같습니다.

 

 

정약용 유적지가 있는 마재마을에 오면 꼭 둘러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마재마을 답사길인데요.

 

실학박물관과 다산정원, 여유당, 정약용 묘, 문도사, 등이며 주변으로 여유당 뒷산인 유산, 생가 앞을 흐르던 실개천인 쇠내, 여유당 동편에 있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 묘, 정약용의 5재조가 지은 정자인 임청정 터, 팔당호가 보이는 열수(다산생태공원)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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