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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부 여행

세종대왕릉의 영릉과 효종대왕릉의 영릉, 여주 영녕릉

by 휴식같은 친구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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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의 영릉과 효종대왕릉의 영릉, 여주 영녕릉

 

 

오랜만에 여주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봄이 오면서 날씨도 포근해지고 나들이하기에 무척 좋네요.

아직 코로나가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고 있지만, 이런 좋은 날씨에 집에만 있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이번 여주여행은 아이에게 역사 현장을 보여주고 싶은 이유도 있었는데요.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여주 영녕릉입니다.

 

여주에 있는 영녕릉은 4대왕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영릉(英陵)과 17대왕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영릉(寧陵)이 있는 곳인데, 영릉이란 한글이름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조선왕릉입니다.

 

대부분 여주 영릉이 세종대왕의 능으로만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효종의 능도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주 영릉은 조선왕릉이 두 곳이 있어서 제법 넓습니다.

입구도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각각에 있고, 주차장도 따로 있습니다.

 

세종대왕릉과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이동했습니다.

 

주차장은 모두 무료로 운영되고 있고, 두 주차장과의 거리는 영녕릉에 있는 숲길인 영릉길을 따라 1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차량으로는 1.3km 정도 떨어져 있음)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세종대왕릉이 있는 곳에 주차를 하고,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을 구경한 후 왕의숲길을 따라 걸어서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을 구경하고 영릉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나오는 방법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기사가 있으면 세종릉에서 효종릉까지 차를 가져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합니다.ㅎㅎ

 

매표소 앞에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이 있는데 코로나로 실내 관람은 운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세종대왕과 효종대왕 그리고 조선왕릉에 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세종대왕의 업적 등을 볼 수 있는데 못 봐서 아쉽습니다.

 

 

 

여주 영릉 관람안내

 

관람시간 2~5월/9~10월 09:00~18:00, 6~8월 09:00~18:30, 11~1월 09:00~17:30

(입장마감은 1시간 전 마감)

휴무일(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료(입장료) 만 25~64세 500원, 그 외 무료

(여주시민 무료, 장애인/유공자/기초생활/차상위) 등은 무료)

주차장 무료

관람 소요시간 1시간 30분 내외

 

한 10여 년 전에 이곳 영릉에 방문을 했었는데요.

당시엔 안쪽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사진처럼 정원으로 꾸며져 있더군요.

그리고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만 개방되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조선왕릉 중 한양에서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서 죽은 후 묻힌 장릉을 제외하곤, 영릉과 영릉은 가장 먼 곳(북한 2기 제외)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은 원래 처음부터 이곳에 묻힌 것이 아니라 한 번 묻혔다가 사연이 있어 다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왕릉 총정리 (분포, 구성, 관람안내)

조선왕릉과 조선왕 계보(조선왕 순서) 알아보기

 

자세한 내용은 왕릉을 보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과거 주차장이었던 이곳엔 세종대왕 동상과 세종대왕이 발견한 각종 과학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주 영릉, 야외 전시물을 통한 세종대왕의 발명품들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민족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란 건 다 아실 겁니다.

조선시대 4대 임금으로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한글을 창제(1446년 훈민정음 반포) 하시고, 수많은 과학기술과 음악, 농업의 발전을 가져온 분입니다. 

 

예전에 주차장이었던 곳에 재실이 들어서 있습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한 건물이네요.

 

재실은 왕실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령(종5품) 등이 지내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에는 재실에 머물면서 제향에 관련된 일을 하였습니다.

재실의 집무실인 재실(재방),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래 세종대왕 재실은 안쪽에 복원된 곳이 있는데, 원래 위치인 이곳에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합니다.

 

제향에 쓰일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모습

 

제관들이 머물던 전사청

 

새로 지은 재실에서 100여 미터 들어가면 또 다른 재실이 나타나는데요.

 

재실이 소실되어 1970년대 성역화 사업 때 현 위치에 삼문과 행랑, 재방 안채만 복원했는데요.

본래의 위치가 아니라서 다시 입구 쪽에 복원을 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릉인 영릉으로 가는 길

 

홍살문과 정자각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종은 이방원인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 왕위에 올라 32년간 재위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군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기며 국가의 기틀을 다진 임금이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해시계, 혼천의, 측우기 등의 과학기구 발명, 집현전 설치, 아악 정비,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활자 제조 및 농업장려 등 정말 업적이 많았습니다.

 

왕릉 앞에 세워진 홍살문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문입니다.

 

홍살문에서 장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와 어로

약간 높은 향로는 제향 때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며, 오른쪽 낮은 어로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고 합니다.

 

세종대왕릉 오른쪽 능선을 따라 진달래 동산이 있는데요.

4월이 되면 푸른 소나무와 함께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왕인 세종대왕과(재위 1397~1450)과 그의 비 소헌왕후(1395~1446)의 능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인 단릉입니다.

 

 

1446년에 소헌왕후가 먼저 돌아가시자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태종의 능)의 서쪽에 영릉을 조성했고, 1450년에 세종대왕이 돌아가시자 소헌왕후와 합장을 하였습니다.

세조 이후 영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현재 위치인 여주로 이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릉의 정자각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제향공간의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丁' 자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불렀습니다.

 

정자각 제향공간에서 바라본 영릉

언덕을 조성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봉분 위쪽만 살짝 보이네요.

 

서쪽에 위치한 수라간, 제향 때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입니다.

 

수복방, 능을 지키는 수복들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영릉 비각,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 둔 건물입니다.

 

세종대왕의 영릉에 있는 이 비각은 영조 21년(1745)에 세운 것으로 표석 앞면의 글은 조상경이 썼고, 뒷면은 이학이 썼다고 합니다.

 

세종대왕 영릉엔 하나의 봉분에 두 개의 혼유석이 놓여 있어 합장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릉을 여주로 옮긴 후 천하의 명당이라는 찬사가 들려왔다고 전해집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으로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 중에서 으뜸이다'라고 적혀있다고 합니다.

 

 

음력 4월 8일은 세종대왕의 기일로 전주 이씨 대동종악원의 주관으로 매년 기신제를 지내고 있다네요.

소헌왕후의 기신제는 음력 4월 28일입니다.

 

아울러 5월 15일엔 세종대왕 탄신일을 맞아 국가제향인 숭모제전이 열리고, 한글날인 10월 9일에는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 경축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영릉 모습

 

조선왕릉은 능을 보호하기 위한 삼면으로 둘러싸인 담인 곡장이 있고, 봉분인 능침 주변으로 난간석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봉분 주위로 능을 지키는 상징물인 석호가 있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석양이 있습니다.

그리고 봉분 좌우에 망부석이 세워져 있고, 중간에 혼령이 노니는 곳이란 혼유석이 놓여 있고, 좌우로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예감 등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영릉을 나와서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까지 10여 분 걸어가는 산책로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왕의 숲길이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에 숙종이, 1730년에 영조가, 1779년에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효종대왕인 영릉(寧陵)을 참배하고 세종대왕릉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의숲길은 09:00~17:00까지만 개방됩니다.

 

언덕 위 쉼터

두 왕릉 간의 거리는 700여 미터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유의 종인 소나무가 예쁘게 조경되어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기분도 좋아집니다.

 

금세 효종대왕과 인선왕후릉인 영릉(寧陵)에 도착했습니다.

 

홍살문

 

조선 제17대 왕인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세자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 생활을 했습니다.

 

 

형제인 둘의 관계는 원만하였으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호의적으로 지낸 반면, 봉림대군인 효종은 청나라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죠..

귀국 후 소현세자는 의문사로 죽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후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 그가 효종입니다.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으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습니다.

대동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습니다.

 

효종과 인선왕후가 있는 영릉(寧陵)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홍살문 안쪽에 금천이 있습니다.

향로와 어로 중간에 금천이 흐르는 특징이 있는 왕릉이네요.

 

수라간

 

수복방

 

영릉의 정자각

 

봉분이 위아래로 2개 보입니다.

 

영릉(寧陵)조선 17대 왕인 효종대왕(1619~1659)과 그의 비 인선왕후(1618~1674)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능을 위아래로 배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상하릉으로 쌍릉을 이루고 있습니다.

 

 

1659년 효종대왕이 돌아가시자 구리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조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병풍석에 틈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하자 1673년(현종 14)에 세종대왕 영릉의 동쪽으로 천장을 하였습니다.

1674년(현종15)에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 아래에 조성하였습니다.

 

효종의 영릉에서는 왕릉에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는 도래솔길을 조성해 놨습니다.

다른 조선왕릉은 멀리서만 볼 수 있는데 비해 이곳에선 조금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쪽에 있는 인선왕후의 능입니다.

 

그리고 위쪽에 있는 효종대왕릉입니다.

 

왕의 능과 왕비의 능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왕의 능엔 능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인 곡장이 있고, 왕비의 능엔 곡장이 없습니다.

이는 왕의 무덤과 왕비의 무덤을 구별한 것이라고 하네요. 

 

효종대왕릉에서 내려오면 재실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조선왕릉 재실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원형이 크게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복원된데 비해, 영릉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건축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 15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주문을 통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안양청이 나오고, 그 옆으로 제기고, 맞은편은 행랑채가 있습니다.

위 사진의 협문을 지나면 재방과 행랑채 부속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재방 앞에는 회양목이 있는데 천연기념물 45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화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열리는 사펄 푸른 나무입니다.

여주 효종대왕릉 영릉 재실에 있는 회양목은 영릉 조성 당시 심어진 것으로 300년 동안 영릉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오래된 재실인 만큼 커다란 나무들도 인상적입니다.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 고목도 재당 옆에 있습니다.

 

 

오랜만에 여주 영녕릉에 방문했는데, 그새 많은 변화가 보였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왕,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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