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묘 다녀오고 다시 본 '영화 덕혜옹주'
지난주남양주 대한제국 1, 2대 황제인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을 관람하고, 홍유릉 둘레길을 따라 걷다가 영원(영친왕 묘)과 회인원, 덕혜옹주묘와 의친왕 묘를 관람하고 왔는데요.
(조선 26대, 27대 왕) 대한제국 1, 2대 황제 고종과 순조의 황제릉, 홍유릉
[조선왕릉] 영원과 회인원, 덕혜옹주와 의친왕 묘(in 홍유릉)
홍류릉에 있는 덕혜옹주 묘를 다녀오고 덕혜옹주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손혜진을 좋아한 것도 다시 보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ㅎㅎ
영화 덕혜옹주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옹녀로 평범하지 않은 태생으로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살아야만 했고, 그토록 오고 싶던 대한민국에 37년 만에 와서 지병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역사의 격랑 속에 비운의 삶을 살았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 덕혜옹주 개봉 당시에는 건성으로 보았다면, 이번엔 덕혜옹주의 삶이 투영되며 매우 안타깝게 보았네요,
영화 덕혜옹주
개봉 2016년 8월 3일
장르 서사, 드라마
감독 허진호
출연 손예진(덕혜옹주), 박해일(김장한), 라미란(복순), 정상훈(복동), 박수영(영친왕), 김소현(어린 덕혜옹주), 박주미(양귀인) 등
러닝타임 127분
누적관객 559만 명
시청등급 12세 이상
평점 관람객 8.72, 기자/평론가 5.95
고종은 명성황후 사이에 순종이 있고, 순종은 순명황후와 순정황후가 있었고요.
고종황제와 순헌황귀비 사이에는 의민황태자(영친왕, 영원)가 있었고, 원손 이진과 황세손 이구(회인원)가 있었습니다.
또한 고종황제와 귀인 장씨 사이에는 의친왕(의친왕 묘)이 있었고,
복녕당 귀인 양씨 사이에서는 덕혜옹주(덕혜옹주 묘)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옹주란 후궁이 낳은 딸)
이렇게 고종에게는 모두 9남 5녀가 있었으나 많은 자녀가 어려서 사망해 어른으로 성장한 후손은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등 3남 1녀뿐이었습니다.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는지 많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준명당에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유치원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덕수궁 내 처소인 함녕전으로 덕혜옹주를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덕혜옹주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고종황제에게 한 줄기 삶의 낙이 되었고, 그녀는 잠시나마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덕혜옹주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일본식 교육과 의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 잃은 백성들의 큰 위안거리가 되어 자주 보도되었으며, 조선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일제는 만 13세의 어린 덕혜옹주를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합니다.
매일같이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영친왕 집에 머물던 덕혜옹주
어느 날 어린 시절 친구로 지냈던 장한(박해일)이 나타나고, 독립운동가들과 영친왕 망명작전에 함께 동참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친왕의 상해 망명작전은 실패하게 되고 덕혜옹주는 단신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역부족으로 역시 실패하고 맙니다.
일본은 1931년에 일본의 백작인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결혼까지 성사시켰습니다.
덕혜옹주는 당시 전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국민 여동생’으로, 그녀가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일보는 결혼식 사진 속 신랑의 얼굴을 삭제하고 지면에 실어 민심을 대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후 덕혜옹주는 조현병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남편과는 합의 이혼했으며, 딸 정혜를 잃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 정권이 바뀌자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다시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것은 37년 만인 1962년으로 13세의 꽃다운 소녀가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충파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온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51세의 덕혜옹주를 너무 늙은 모습으로 표현한 것 같음)
귀국 후에 서울대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하지 못하고 1967년에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낙선재는 1847년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공간이며, 1884년 갑신벙변 직후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한 적이 있고, 순종도 국권을 빼앗긴 이후인 1912년 6월부터 거주한 곳입니다.
1963년 환국한 영친왕 이은은 1970년에 생을 마감했고, 1968년에 황태자비 이방자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행을 보냈습니다.
조선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이방자와 덕혜옹주가 낙선재와 수강재에 함께 머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만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고,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습니다.
나라를 잃은 암울한 시대,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았던 황실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제와 친일파의 정치적 도구가 되어 만 13세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덕혜옹주’는 그 시대의 슬픈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또한 끝내 정치적 풍랑에 휘말려 광복 후에도 바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나라와 역사에서 잊혔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그리움 단 하나로 삶을 이어가야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이야기는 덕혜옹주를 잊고 있었던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선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덕혜옹주의 정신이 맑을 때 썼던 낙서 한 장에 적힌 글귀입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 대한민국 우리나라”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다짐과 조선 황실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싶은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글이며, 영화 덕혜옹주 마지막에 낙사 사진과 자막으로 나오며 마무리됩니다.
평범한 신분이 아니었기에 역사의 격랑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아픔이 새삼 동기화되어 일본인들의 만행에 치가 떨리고, 울분이 더해지는 느낌입니다.
처음 본 영화 덕혜옹주는 단순히 영화로 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나, 덕혜옹주 묘를 다녀오고 그녀의 삶을 이해하면서 보게 된 영화 덕혜옹주는 색다르게 다가온 시간이었네요.
아울러 덕혜옹주 묘는 아버지가 묻힌 남양주 홍유릉과 그리고 홍류릉 바깥 쪽에 영친왕과 의친왕 옆에 묻혀 있는데요.
죽은 후에도 고양 서삼릉에 묻혀 있는 어머니 귀인 양씨와 떨어져 있는 부분은 무척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일부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 인물한국사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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