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휴식같은 여행으로의 초대 ♪♩♬~
인천경기 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현판이 달린 사찰(절), 남양주 봉선사

by 휴식같은 친구 2024. 3. 24.
반응형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현판이 달린 사찰(절), 남양주 봉선사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는 969년(고려 광종 20) 법인국사 탄문운악사라 창건한 사찰이며, 그 후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광릉을 조성한 후 세조의 명복을 비는 광릉의 원찰로 봉선사라 한 사찰입니다.

 

또한 1551년(명종 6)에는 선종의 봉은사와 더불어 문정왕후에 의해 교종의 중심이 된 절로 지정되어 승과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하여 교학을 진흥하는 중추적인 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는 불며 무려 7차례 중창을 거듭했고, 1969년 주지 운허스님 큰법당 등을 중건했는데요.

운허스님은 경전의 뜻만 알면 되는데 경전을 보기 위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굳이 한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운허의 뜻으로 보통 사찰에서 대웅전 기능을 하는 전각의 현판을 한글로 '큰법당'이라 적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현판이 달린 사찰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큰법당은 주련에도 한글을 사용했고 내부에도 화엄경과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 벽면에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작년 여름에 광릉 국립수목원에 방문하면서 들렀다가 이번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봉선사는 교종의 본원사찰입니다.

교종은 특정한 불교경전에서의 가르침우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귀족층을 중심으로 교종이 발달했고, 신라시대 불교의 주를 이루었습니다.(화엄종)
선종은 개인이 수행과 해탈을 통해 부처의 성품임을 깨달을 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번성했습니다.(조계종)

 

 

조선 7대 임금의 조선왕릉인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의 광릉을 방문한 후 봉선사를 다시 찾았습니다.

 

세조의 능이 들어선 후 광릉 일대는 풀 한 포기조차 마음대로 뽑을 수 없는 없을 정도로 500여년간 잘 보호된 숲이 되었고, 지금은 광릉 국립수목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봉선사에서 광릉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길에는 아름드리 잘 가꾸어진 숲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광릉숲길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조선왕릉, 광릉

포천 광릉 국립수목원(광릉수목원) 예약, 주차장, 입장료 및 여름풍경

서울 근교 걷기 좋은 숲길, 광릉숲길 (광릉숲 둘레길)

 

 

 

 

봉선사는 세조의 광릉이 조성된 이후 정희왕후가 광릉의 원찰로 운악사를 중건해 봉선사라 불렀습니다.

당시 봉선사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고, 보물 397호인 봉선사 대종을 주조했습니다.

 

1790년(정조 14)에는 나라에서 전국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5규정소를 설치할 때 이 절은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였고, 1848년(헌종 14)에는 화주 성암과 월성이 중수하였고, 1902년에 도성 안의 원흥사를 수사찰인 대법산으로 삼았을 때 이 절은 16개의 중법산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하기도 했습니다.

 

1911년에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교종대본산으로 지정되어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해 왔습니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입니다.

 

봉선사는 1919년 봉선사와 부평리 3.1 운동 만세 시위지입니다.

 

봉선사 승려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제작한 곳으로 1919년 3월 29일, 봉선사 태허, 지월, 완수 스님과 약종상이었던 김석로가 봉선사에서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시위 전개와 방침을 논의한 후 선언문 200여장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선언문을 진접읍 일대에 배포하고 30~31일에 광릉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봉선사 연꽃단지

 

봉선사 부지는 워낙 넓은데, 사찰 앞에는 커다란 연못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매년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이곳에서 봉선사 연꽃축제가 연린다고 하는데요.

다음엔 연꽃이 필 때 한 번 다시 찾고 싶네요.

 

연꽃단지 위에는 연꽃이 필 때 바라보며 빵과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봉선사 파드마 카페가 있습니다.

 

벌써 물속에는 연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물에서도 때 묻지 않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유교와 불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불상들

연꽃 호수를 배경으로 은은히 미소짓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봉선사 연꽃단지 모습

 

봉선사 앞 분수가 나오는 작은 호수정원

 

봉선사 봉향각

한옥건물로 전통차와 커피, 종교물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고즈넉한 봉선사 풍경을 바라보며 쉬어가기 좋은 곳입니다.

 

봉향각에서 바라본 작은 호수정원

따뜻한 봄날씨를 즐기기 위해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봉선사 느티나무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먼저 세상을 뜬 세조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절 이름도 운악사에서 봉선사로 고쳤는데요.

당시에 심은 느티나무로 550년이 넘었습니다.
 

봉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굳건하게 살아남은 역사를 증언하는 나무입니다.

 

광릉의 원찰로 하마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봉선사 청풍루와 범종루

 

범종루에는 보물 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동종이 있습니다.

정희왕후가 예종 원년(1469년) 왕실의 발원으로 제조한 범종으로 높이 238㎝, 입지름 168㎝, 두께 23㎝라고 합니다.

 

융통이 없고, 종의 꼭대기에는 용 모양의 장식이 달려있으며 곳곳에 연꽃잎과 보살상을 조각해 꾸몄는데요.

당시 문신이었던 ‘강희맹’이 직접 지은 명문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 온갖 국난을 이겨낸 봉선사 동종.

진짜 대종은 안전을 위해 청풍루 앞 전각 1층에 보관해 두고, 전각 2층의 대종을 본떠 만든 종을 주로 치거나 연말 송년 행사 때만 진짜 종을 친다고 합니다.

 

봉선사 동종은 봉선사의 상징이기도 한데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꼭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석조 관세음보살상

 

성모마리아상을 닮은 이 관세음보살상은 서울대 미대 교수였던 최종태 작가의 작품(2017년)으로 길상사(2000년)에도 동일한 관세음보살상이 있습니다.

최종태 교수는 혜화동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을 조각하는 등 성모상 조각으로 유명한데, 가톨릭에 입문하기 전 오랜 기간 불교 공부에 매진하면서 이미 그의 예술성 속에 조각적 본성으로서 불상조각이 깊이 자리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봉선사 운하당

 

봉선사 대웅전 격인 큰법당 앞에는 벌써 부처님 오신 날 분위기가 느껴지게 형형색색 등이 잔뜩 걸려 있습니다.

 

봉선사 청풍루인 설법전

 

봉선사 '큰법당'

 

봉선사 대웅전으로 1969년 주지 운허스님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스님이기도 하며, 불교의 한글화에 힘쓴 영향으로 대웅전(大雄展)이란 한자 대신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현판을 단 사찰입니다.

 

운허스님(속명 이학수)은 춘원 이광수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 함께 공부한 8촌 형으로 봉선사 진입로에 부도탑이 있는데, 이곳에 춘원 이광수 선생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초창은 조선 예종 1년(1469)으로 89칸의 절 규모와 함께 서울 이북에서 가장 크다고 전해졌으며, 재창은 1637년 계민선사에 의한 일괄 중수 때, 삼창은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된 현 전각으로,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운허스님의 제자였으며 봉선사 주지스님이었던 월운 해룡스님은 총 3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한글대장경으로 318권 번역, 완간 작업을 주도하는 등 불교경전의 한글화에 평생을 바친 스님이기도 합니다.

그런 공로로 2001년 한글학회 외솔상과 2005년 대통령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봉선사가 한글사랑을 실천하는 본보기 사찰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사찰 전각은 목조건물로 짓는 게 일반적인데 봉선사 큰법당은 재건 당시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은 것입니다.

콘크리트라 가치가 없을 것 같지만, 한글을 사용한 운허의 뜻과 콘크리트라는 당시의 건축기술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52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70년 운허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고 합니다.

한자 대신 큰법당이란 한글 현판이 걸려 있어 왠지 낯설지만, 두어 번 바라보니 더욱 정겹게 느껴집니다.

 

봉선사 입구의 일주문 역시 한자 대신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이 적혀 있습니다.

운허스님의 유고 중에서 글자를 골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벽에 그려진 벽화

큰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125매)과 한문 법화경(227매)을 동판에 새겨놓았습니다.

 

봉선사에는 보물(1792호)로 지정된 봉선사 비로자나 삼신괘불도가 있는데요.
 괘불은 절에서 큰 법회를 열 때 그림을 그려서 법당 앞에 건 부처그림을 말합니다.


조선 영조 11년(1759) 상궁 이성애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불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선사 5층 석탑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봉선사 관음전

원래는 노전 스님이 머무는 노전채였던 것이 6.25 때 전소되어 1999년 복원되어 지금은 관음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봉선사 삼성각

 

월초 화상에 의해 1926년에 건립되어 6.25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라고 합니다.

산신, 칠성, 독성 세 분의 성인을 모셨다 하여 삼성각이라 합니다.

 

봉선사 조사전

 

1977년 7월 대시주 정보현행의 도움으로 삼성각과 동일한 규모로 지어서 원래는 '개건당'으로 사용하던 당우인데요.

근래 들어 그 아래쪽에 새로이 전각을 지어 개건당에 모셔졌던 봉선사의 개산과 중건의 공덕주들을 모시고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계민선사와 월초스님을 비롯한 근대의 봉선사 조사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무에 걸린 빨간 등

 

봉선사 대의왕전


사찰에서는 보통 약사전에 약사불을 모시는데 봉선사에서는 정자 형태의 대의왕전에 약사불을 모시고 있는 모습입니다.
약사불은 병을 고쳐주는 부처란 의미로 대의왕불이라고도 부릅니다.

 

봉선사를 구경하고 야외 호수정원으로 나왔습니다.

호수정원 위에 있는 대형 미륵암

 

봉선사 일대 풍경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