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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경기 여행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조선왕릉, 광릉

by 휴식같은 친구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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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조선왕릉, 광릉

 

 

남양주 광릉수목원 옆에 있는 광릉조선 7대 임금인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입니다.

 

조선왕릉 42기 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는데요.

그동안 개인적으로 조선왕릉 40기 중 광릉을 마지막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내부에 돌방을 만들지 않고, 회격(관 사이 석회를 메우는 일)으로 처리했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생략된 조선왕릉입니다.

당시 부역인원과 조성비용을 감축한 사례로 왕릉 조성의 모범을 보인 곳이라고 하네요.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와 정희왕후의 조선왕릉, 광릉 이야기입니다.

 

광릉은 포천과 남양주 경계, 포천 광릉 국립수목원 옆에 있습니다.

봉선사에서 광릉 숲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으면 우측 편에 광릉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광릉 주변에 조성된 국립수목원으로 광릉이 조성된 1468년부터 550여년 동안 임금님의 숲으로 불리며, 광릉 주변의 숲은 엄격히 관리되어 지금의 천연림이 된 곳입니다.

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되다 보니 북한산, 소백산, 주왕산 보다 생물다양성이 우수하다고 전해집니다.

실제 광릉요강꽃, 광릉물푸레나무, 광릉제비꽃 등 광릉이란 접두어를 가진 식물이 10종이나 됩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서 임업 관련 기관이 가장 먼저 들어서면서 지난 100여년 간 인공림을 조성한 것도 광릉숲의 매력입니다.

 

포천 광릉 국립수목원(광릉수목원) 예약, 주차장, 입장료 및 여름풍경

 

 

 

광릉숲길은 봉선사 입구에서 시작해서 세조의 조선왕릉인 광릉을 지나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에 있는 광릉 국립수목원까지의 3km 숲길을 말하는데요.

서울 근교 걷기 좋은 숲길로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된 곳입니다.

 

아울러 운악산 봉선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로 고려시대 969년(광종 20)에 운악사로 지어졌고, 1469년(예종 1) 정희왕후가 세조를 추모하며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중창한 뒤 봉선사라 한 사찰입니다.

 

 

서울 근교 걷기 좋은 숲길, 광릉숲길 (광릉숲 둘레길)

연꽃과 정원이 예쁜 사찰(절),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

 

남양주 광릉 관람안내

 

관람시간 : 2~5월/9~10월 09:00~18:00, 6~8월 09:00~18:30, 11~1월 09:00~17:30

(1시간 전 입장마감)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관람 소요시간 30~40분

관람요금(입장료) 25~64세만 1,000원, 그 외 무료

주차장 무료

 

입구에는 광릉 역사문화관이 있습니다.

광릉 조성 경위와 세조와 정희왕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500년을 넘게 유지해 온 숲속의 왕릉, 남양주 광릉

 

조선왕릉조선시대(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말합니다.

왕릉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500년 넘게 이어 온 왕조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어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조선왕릉 총정리 (분포, 구성, 관람안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했습니다.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의 면당을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조성했습니다.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을 이전시키고 이곳 광릉에 능을 조성했고, 1483년(성종 14)에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광릉 동쪽 언덕에 정희왕후의 능을 조성했습니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1418~1483, 재위 1455~1468)는 4대 임금인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로 태어나 수양대군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죠.

1450년 형인 문종이 5대 임금으로 즉위했으나 병으로 오래 집권하지 못하고, 1452년에 어린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조카인 단종이 6대 임금으로 즉위했습니다.

 

1455년 권력에 눈이 멀었던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3년 만에 조카를 유배 보내고 조선 7대 임금에 등극했습니다.

세조는 즉위 후 사육신 사건을 비롯하여 동생이었던 금성대군이 주도한 단종 복위운동으로 단군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했고, 말년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피부병으로 고생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에서 세조의 괄목할만한 치적도 많이 있습니다.

의정부의 정책결정을 폐지하고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력 강화와 북방개척, 직전법 실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썼습니다.

 

 

 

정희왕후(1418~14830)파평부원군 윤번과 흥녕부대부인 이씨의 딸로 1428년(세종 10) 세조가 진평대군이던 시절에 혼례를 올렸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에 책봉되었습니다.

 

1468년 둘째 아들 예종(8대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나이가 어려 일찍 죽은 첫째 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을 왕(9대 임금)으로 지목했습니다.

1469년부터 1475년까지 어린 성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고, 1483년에 온양에 있는 행궁에서 세조가 떠난 지 15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 7대 임금이 죽은 후 묘호로 세조가 정해졌습니다.

 

'조'는 원래 나라의 창업자에게 붙는 묘호이고, 이후 후대 왕들은 '종'을 쓰는데요.

당시 세조의 묘호로 신종, 예종, 성종으로 거론됐으나, 예종이 고집해 결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계승한 왕이라는 세(世) 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 조(祖) 자를 모두 가진 왕이 된 것입니다.

세조 외에도 후에 선조와 인조 역시 사후에 무리하게 묘호를 붙인 것이라고 하네요.

 

세조는 생전에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고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석실과 석곽, 병풍석을 사용하면 큰 돌을 떼어와 다듬고 문양을 새겨야 해서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경비를 절감하게 됐고 이후 조선왕릉에는 석실을 만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역시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정자각을 각각 따로 지어 사용하다가 정희왕후의 흉례가 끝난 후 두 능 사이로 옮겨 하나로 합했습니다.

 

조선왕릉의 공간구성

 

왕릉 입구부터 능까지의 배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재실(제향을 준비하는 곳)을 지나 금천교(능과 속세를 구분), 홍살문(신성한 곳을 의미), 판위(왕이 경건하게 기다리는 곳), 어로(왕이 다니는 길)와 향로(제관이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 좌우로 수라간(제향 음식준비하는 건물)과 수복방(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무는 건물), 정자각(제향을 지내는 건물), 비각(왕의 행적을 적은 비석), 신로(능으로 향하는 왕의 혼을 위한 길)와 예감(축문 태우는 곳), 산신석(산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 있습니다.

 

왕릉의 구조석마(말 모양의 석물), 무석인(무인의 석물)과 문석인(문인의 석물), 장명등(어두운 사후의 세계를 밝히는 석등), 석상(왕의 혼이 노니는 곳), 망주석(멀리서 능임을 알 수 있는 돌기둥), 석양과 석호(왕을 지키는 양과 호랑이 석물), 난간석(울타리 돌), 병풍석(봉분을 보호하는 돌), 봉분(왕이 잠들어 있는 곳, 곡장(봉문의 동/서/북 담장) 등입니다.

 

왕릉이 있는 풍경, 광릉과 광릉숲

 

광릉 배치도

 

입구로 들어서면 광릉 역사문학관이 있고, 그 위에 재실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홍살문이 있고 정자각 너머 서쪽이 세조, 동쪽이 정희왕후의 조선왕릉입니다.

 

광릉 재실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이 상주하고 제향을 지낼 때 관련된 일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그리고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광릉 재실은 재실과 일부 행랑만 남아 있습니다.

예전엔 전사청 6칸, 제기고 3칸, 안향청, 재실 6칸 등으로 구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릉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작은 저수지

 

광릉 하마비

 

이곳을 지날 때에는 대소인을 불구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의미의 비석입니다.

조선왕릉 중 현존하는 유일한 하마비입니다.

 

광릉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부터 450여 미터로 5~10분이면 도착할 거리입니다.

 

광릉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아름드리 500여년 이상된 전나무들이 서 있습니다.

세조는 1468년 자신의 능이 들어설 자리를 능림으로 정한 뒤 능 주변과 진입로에 소나무와 전나무, 잣나무 등을 심과 능원과 산직을 두어 관리했다고 합니다.

 

광릉숲도 한때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풀뿌리까지 캐다 쓸 땔감문제로 도벌이 횡행해서 이를 지켜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1 960~70년대 솔잎혹파리가 창궐하면서 소나무가 대부분 고사해 그 자리에 리기다소나무, 잣나무, 낙엽송을 심다고 합니다.

 

광릉이 보입니다.

 

봄도 됐으니 광릉 주변을 산책할 수 있는 광릉 산책로(숲길)가 있는데요.

지금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광릉 홍살문

이곳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입니다.

 

정면으로 정자각이 보입니다.

광릉의 세조와 정희왕후 능 앞에 따로 두었다가 정희왕후의 상이 끝난 후 두 릉의 중간으로 옮기며 하나만 두게 되었습니다.

다른 조선왕릉에는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향로와 어로가 있는데, 광릉에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엔 있었으나 소실된 것이라고 하네요.

 

정자각 좌측이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의 조선왕릉, 우측이 그의 비 정희왕후의 조선왕릉입니다.

 

광릉 수복방(동)과 수라간(서)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수복이 머물던 건물이고, 수라간은 제향을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입니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광릉 진입로

소나무도 있지만, 아름드리 전나무가 들어선 것이 이곳만의 특징인 듯하네요.

 

진설도와 기신제

광릉 제향일은 음력 9월 8일입니다.

 

정자각 내부 모습

 

광릉 비각

세조와 정희왕후의 행적을 적은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입니다.

 

동쪽의 세조와 서쪽의 정희왕후의 능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능을 조성했는데, 계곡처럼 패인 곳엔 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은 수로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돌들도 제법 많이 있네요.

 

조선왕릉은 19곳에 40기가 있는데, 이날 광릉을 마지막으로 조선왕릉 모두를 관람했습니다.

 

조선왕릉의 모습이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무덤이라는 다소 음지의 개념이 있어 보이지만, 지금은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고 주변을 산책하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조선왕릉 순례도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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